꽉막힌 행정에… 매몰찬 인심에…
구청 “등기설정 안돼” 지원 미적… 부동산측은 “입금안돼 열쇠 못줘”
10시간 떨다 결국 찜질방으로… 원장은 짐 지키느라 ‘밤샘 노숙’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23일 오후 8시경 서울 용산구 주택가 골목. 길 한쪽에 장롱에 이불 냉장고 휠체어 등 이삿짐이 30m가량 줄지어 놓여 있고 옆에는 장애인 6명이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사회복지시설 ‘행복의 집’ 원장 정진석 씨(68)와 남편 최성원 씨(69·목사)도 눈시울을 붉혔다.
정 씨 부부와 장애인들은 이날 새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짐을 실어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문을 코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했다. 최 씨는 주변에서 얻어온 찜질방 할인권을 장애인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단 여기 가서 쉬세요.”
2002년 문을 연 행복의 집은 민간 복지시설로, 정부에 신고해 일부 관리감독은 받지만 별도의 보조금이나 운영비를 지원받지는 못한다. 처음엔 정 씨 부부가 8000만 원 전셋집을 마련해 운영했지만 2006년부터 용산구가 보건복지부의 복권기금을 통해 전세금 1억4000만 원을 지원했다. 정 씨는 2000만 원을 보태 1억6000만 원 전셋집을 얻어 살아왔다.
현재 이곳의 장애인은 총 10명. 주로 노숙인 등 갈 곳 없는 장애인이다. 김모 군(17)도 보육원에서 자란 뒤 거리를 전전하다 지난해 9월 용산역에서 최 씨를 만나 이곳으로 왔다. 지적장애인인 김 군은 글도 읽을 줄 모른다. 치매를 앓는 박모 씨(61)도 시장을 전전하다 행복의 집에 왔다.
정 씨 부부는 자신들의 기초연금과 일부 장애인에게 나오는 기초생활보장 수급비, 후원금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이마저도 넉넉지 않아 매일같이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 가서 상인들이 팔다 남은 채소를 얻어오고 있다.
용산구는 이들이 전셋집 계약만료 등으로 이사를 할 때면 전세금을 돌려받아 새집 주인에게 입금해줬다. 이번에도 집 계약이 만료되자 정 씨는 지난해 12월경 용산구와 이사 문제를 상의해왔고, 1억6000만 원에 새 전셋집을 얻어 23일 오전 이삿짐을 옮겼다.
전에 살던 집의 주인은 이삿날 용산구에 전세금을 돌려줬다. 하지만 용산구가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새집 주인에게 전세금을 입금하지도 않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용산구는 “정부 예산인 만큼 보증금을 확보하기 위해 새집에 전세권을 등기한 후에야 전세금을 입금할 수 있다”고 했다. 새집 주인을 대리한 부동산 중개업소에선 전세금을 받지 못하니 당연히 집 열쇠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장애인과 정 씨 부부가 길바닥에 나앉았다.
전세권을 등기하려면 집주인의 인감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새집은 부부 공동명의였고 집주인 부부 중 한 명이 이삿날 오전 일주일 일정으로 해외로 출국하면서 등기가 불가능해졌다. 용산구는 이삿날이 될 때까지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행복의 집 거주 장애인 중 병원에 입원한 4명을 제외한 6명은 이삿날 1t 트럭 5대로 실어 나른 짐을 길바닥에 놓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추위에 떨며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찜질방으로 향했고, 정 씨 부부는 짐을 지키기 위해 길에 세운 트럭 안에서 밤을 새웠다.
부동산 중개업소와 정 씨는 전세권 등기를 이야기했느냐를 놓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용산구 관계자는 “원장이 집주인과 얘기가 다 됐다(전세권을 등기한다는 뜻)고 하길래 그런 줄만 알았다. 미리 챙기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본보의 취재가 시작되자 용산구는 24일 저녁 집주인과 계약을 마무리하고 우선 장애인들을 입주시키는 데 합의했다. 이어 25일 오전 전세금을 입금한 뒤 다음 주에 전세권을 등기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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