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정한 기준선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생각 없이 흙을 퍼내는 인부들 때문에 목곽(木槨) 안의 유물이 파괴되거나 교란될 우려가 있었다.”(1927년 ‘사학잡지’ 발표 보고서)
일제강점기 서봉총 발굴을 현장에서 지휘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서봉총 발굴 직후 학회지에 낸 약식 보고서 중 일부다. 발굴 당시 목관과 유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위 주변에 기준선을 대강 잡고 그 위에 쌓인 봉분의 흙을 한꺼번에 들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칫하면 인부들의 삽질에 유물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이즈미는 위험한 발굴을 감행했다. 박진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분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봉분도 양파껍질을 벗기듯 퇴적층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파내려가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고이즈미가 쓴 약식 보고서와 1986년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서봉총 발굴은 1600여 명을 동원해 불과 54일 만에 마무리됐다. 서봉총뿐만이 아니다. 고이즈미 발굴팀은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무려 50여 기의 신라고분을 발굴했다. 수십 년 걸릴 발굴을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광석화처럼 진행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실마리는 그가 손잡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사진)에게 있다.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모로가가 진력으로 사이토 총독을 움직여 공식 발굴 허가를 얻게 되면서 우리가 다년간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썼다. 도굴꾼이었던 모로가는 유구에 대한 정밀 탐색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고분 속 유물을 꺼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실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해외 환수 문화재 28건 중 6건이 그가 빼돌린 것들이다.
모로가가 발굴 비용을 대기 위해 건설업자를 끌어들인 것도 부실 발굴의 화근이 됐다. 당시 경주역에 열차 관리시설을 짓는 공사에 많은 흙이 필요했는데 모로가는 서봉총 발굴을 지원받는 대신 건설업자가 봉분의 흙을 퍼 가도록 했다. 빠른 공사를 원하는 업자들은 발굴을 재촉했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영리업자와 공동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원칙적인 학술 발굴 방법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적었다.
:: 서봉총(瑞鳳塚) ::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신라고분이다. 조선총독부 초청으로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 발굴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스웨덴을 뜻하는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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