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초, 병실로 찾아온 한 40대 여성이 말했다. 간암 투병 중인 송모 씨(65)를 간호하던 부인 김모 씨(62)와 가족들은 낯선 이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폭탄선언에 기가 막혔다. 알고 보니 송 씨가 2003년부터 두 집 살림을 했고, 2004년 얻은 혼외자 A 군 양육에 물심양면 지원하며 아빠 노릇을 해왔던 것. 1973년 송 씨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고 35년을 해로한 김 씨에겐 날벼락과도 같았다. 자녀들도 난데없이 등장한 이복동생의 존재에 당혹스러웠다.
가장에 대한 배신감도 잠시, 김 씨와 자녀들은 곧바로 재산 지키기에 나섰다. 부부가 서적 도매업으로 일궈 온 수십억 원의 재산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에서였다. 송 씨가 죽기 전에 송 씨의 부동산 등 상속재산 일부에 대해 증여 절차를 밟았다. 한편 내연녀로부터는 장남 명의의 아파트 1채 소유권을 이전해주는 대신 “내연관계를 청산하고 추가로 돈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A의 친자확인 요구와 재산 상속을 포기한다”는 합의각서를 받아 공증까지 받았다. 송 씨는 그해 12월 20일 사망했다.양측이 굳게 믿은 사전 포기 각서는 과연 효력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각서는 법적으로 무효다. 친자확인 내지 인지 청구는 혼외자 본인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없는 고유한 법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혼외 자녀가 친부모를 상대로 자기 자식임을 확인해 달라는 ‘인지 청구권’은 신분관계상 권리여서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하기로 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해도 효력이 없다. 각서대로 아파트 소유권이 이전되지 않자 A 군 측이 2009년 2월 제기한 인지 청구 소송에서 서울가정법원 재판부도 이 때문에 양측의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유족들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유전자 검사에 응하지 않았고 송 씨가 A 군 출산 시 수술 청약서를 작성했으며 출생 후 육아에 참여한 점 등으로 미뤄 A 군은 송 씨의 친아들이 맞다”고 판결했다.
친자 확인 이후 분쟁은 상속분 청구로 이어졌다. A 군 측은 “혼외자도 엄연히 상속 재산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김 씨와 자녀들은 “우리 가족이 힘들게 일해 불린 재산을 줄 수 없다”며 맞섰다.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부장판사 이수영)는 A 군이 제기한 상속분상당가액지급청구 소송에서 “상속 포기는 상속이 개시된 후부터 가능하고 혼외자가 상속권을 청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행사”라며 “A 군도 공동상속인으로서 상속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다”고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송 씨가 죽은 뒤에야 개시되는 상속에 대해 미리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이미 자녀들이 나눠 가진 재산을 포함해 상속분을 재산정한 뒤 “김 씨 등 4명이 A군에게 21억6229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결국 김 씨와 자녀들이 받은 내연녀의 각서는 종이조각에 불과했던 셈이다.
A 군처럼 혼외 자녀들도 친부모가 사망한 뒤 상속이 개시되면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다. 우선 사망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인지 소송이나 친생자부존재확인 재판을 통해 공동상속인으로 인정을 받으면 된다.
상속전문 법무법인 천명의 경태현 변호사는 “간통죄가 폐지된 후 형사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혼외자 가족들의 호적 등록이나 상속 요구와 같은 권리 찾기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상속분상당가액지급청구권 ::
생부·생모가 사망한 뒤 인지 소송 등을 통해 공동상속인이 된 사람이 기존 공동상속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상속분에 상당하는 액수를 달라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