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교니? 캠퍼스니?…동아리도 차별
● 인기학과, 비인기학과 서열화
● 내부망 통해 비하 조장하고 공격
우리나라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학력 차별을 가장 심각한 차별로 여긴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1년). 학벌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는 물론 배우자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력 차별은 기성세대만의 의식은 아닌 듯하다. 요즘 대학생 중 상당수도 이런 태도를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학벌이 좋다고 하는 편에 속하는 학생들이 자기네끼리 우열을 가리는 현상까지 나타나는 것 같다. 취업난이 심해지고 출신 학교나 학과가 중요 스펙으로 인식되면서 여유와 관용을 잃어가는 듯싶다.
특히 명문대로 알려진 고려대·연세대 학생들 사이에서 서울 본교 학생과 지방 캠퍼스 학생을 차별적으로 구분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2014년 7월 연세대 독립언론이 ‘연세대 학생들 내에 카스트제도가 존재한다’는 취지의 기사를 실으면서 이 문제가 공론화한 바 있다. 기사에 따르면 일부 연세대 학생들은 본교(서울 신촌 캠퍼스) 학생과 원주 캠퍼스 소속 학생을 차별적으로 대하고 본교 학생들도 인기 학과인지 비인기 학과인지에 따라 서열화한다고 한다. 기사가 나간 뒤 “소수의 편협한 의견을 연대생 전체의 인식인 양 성급하게 일반화했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연세대에선 이에 관한 날 선 찬반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필자는 고려대 재학생이어서 고려대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취재했다. 사실, 상대의 면전에서 대놓고 학력을 차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 익명으로, 은밀하게 이런 차별 문화를 조성하기 마련이다. 재학생만 접속이 가능한 내부망이 여기에 주로 이용된다. 이 때문에 외부에선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렵다. 연세대에서 교내 학력 차별을 조장하거나 학력을 이유로 특정 학생들을 공격하는 주장들은 재학생 커뮤니티인 ‘세연넷’에서 주로 이뤄졌다고 한다.
필자는 ‘고파스’와 같은 고려대 재학생들의 내부망을 취재했고 관련 학생들을 인터뷰했다. 고파스는 세연넷에 비해 회원 수가 월등히 많다. 2015년 1월 현재 고파스는 대학 커뮤니티 랭킹 1위이고 세연넷은 36위다.
취재 결과, 일부 연대생과 마찬가지로 일부 고려대생도 본교(서울 안암 캠퍼스) 학생과 세종 캠퍼스 소속 학생 간 차별을 두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복적 의견 개진, 학력을 이유로 분교 학생들을 비난하는 심각한 공격, 다수 재학생에 공개되는 큰 파급력으로 볼 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수준으로 보였다. 연·고대의 지방 캠퍼스 학생들도 훌륭한 인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창끝 같은 교내 학력 차별 주장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듯했다. ‘김밥가게’에서 ‘졸업앨범’으로
고려대 세종 캠퍼스 학생 A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재된 기사와 여기에 덧붙여진 의견을 읽어 내려가다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해당 교내 기사는 “세종 캠퍼스에 입점한 모 김밥가게가 수시 응시생들을 상대로 가격을 올려 받았다”고 보도했고 많은 사람이 이 기사에 의견을 달았다. A씨는 당연히 ‘상술이다, 아니다’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줄 알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참여자들은 김밥가게는 뒤로한 채 “안암이랑 세종이랑 같은 학교야?”라는 의제로 넘어갔다. 안암 캠퍼스 학생들은 “아님. 같은 학교 아닌데 졸업사진은 안암 캠퍼스에서 같이 찍더라. 심지어 졸업앨범에도 같이 나오더라(기분 나쁨)”라는 의견을 계속 올렸다고 한다. 이들은 세종 캠퍼스 학생이 본교로 소속을 변경하는 문제를 따졌다. A씨는 “김밥가게의 상술이 왜 졸업앨범 문제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속이 상했다”고 말했다.
필자가 접한 여러 세종 캠퍼스 재학생은 A씨와 비슷한 불쾌감을 호소했다. 세종 캠퍼스 소속으로 안암과 세종을 오가며 수업을 듣는 B씨는 “고파스를 자주 쓴다. 그런데 조회 수나 댓글 수가 많은 글을 읽다 ‘세종’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기만 해도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번엔 또 무슨 내용인가’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된다”고 말했다.
세종 캠퍼스 재학생 D씨는 “세종 캠퍼스와 관련된 학생들의 의견 중에 좋은 의견도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지방 캠퍼스는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민폐덩어리라는 매질이 추가된다. 언급되는 것 자체가 두렵다”고 했다.
내부망에 세종 캠퍼스 학생들과 관련된 화두만 던지면 약속이나 한 듯 학생들이 달려들어 의견을 남기는 것 같았다. 한 본교 재학생은 “대부분의 분교생은 본교를 사칭한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 주장은 새로운 토론 이슈가 됐다. 이에 대해 세종 캠퍼스 재학생 E씨는 “이리저리 입방아에 오르는 내용을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취재를 하면서, 본교-분교 차별 문제를 두고 본교생은 공세적인 반면 분교생은 속으로 삭이며 침묵하거나 저자세를 취하는 경향성이 발견됐다. 이에 대해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방 캠퍼스 학생들도 학벌을 지위와 권력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본교생이라는) 권력에 굴복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저자세를 취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부 본교 학생들은 왜 세종 캠퍼스 학생들에게 분노하고 이들을 공격할까. 고파스에 올라온 수많은 의견을 분석해본 결과 두 가지 이유로 집약됐다. 첫째, 배타적 권리 침해. 안암 학생들이 힘든 입시경쟁을 거쳐 쟁취한 학교 이름을 세종 학생들은 소속 변경으로 너무 쉽게 가져간다. 둘째, 연대 책임. 세종 학생들이 잘못을 해도 고려대 전체의 명예가 훼손돼 안암 학생들까지 피해를 본다.
배타적 권리 침해와 관련해, 세종 캠퍼스 소속 학생들 중 일부는 본교 학생들과의 경쟁을 통해 본교의 학과를 이중전공, 복수전공 등으로 이수한다. 이는 학칙에 의한 정당한 과정이다. 취업 시 일부 대기업은 안암 출신인지 세종 출신인지 구분하기도 한다. ‘소속 변경’으로 권리를 침해받을 일이 별로 없다. 연대 책임과 관련해, 세종 캠퍼스 학생들이 학교 명예를 실추할 정도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일부 본교 학생들이 세종 캠퍼스 학생들을 공격하는 근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학벌세탁충’
본교 사범대에 재학 중인 F씨는 매일 고파스에 접속한다. 그는 “‘학벌세탁충’등 본교로 오는 세종 캠퍼스 학생들을 비하하는 용어가 종종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이어 “편입생보다는 세종 캠퍼스 학생들과 관련된 의견에 반응이 더 뜨겁다”고 덧붙였다.
고파스에서 화제가 되는 토론 소재를 ‘떡밥’이라 하는데, 세종 캠퍼스 학생들 관련 의견들은 ‘서창떡밥’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서창 캠퍼스는 세종 캠퍼스의 이전 이름이다. F씨는 “서창떡밥은 흥행이 보장되는 떡밥”이라고 했다.
고파스 내의 익명 게시판은 ‘식물원’과 ‘동물원’ 게시판으로 나뉜다. ‘격한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동물원 게시판을 주로 이용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서창’은 금지어로 돼 있다. F씨는 “비하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되다보니 금지한 것 같다. 그러자 ‘썩창’ ‘Suck창’으로 틀어서 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파스에선 ‘서창떡밥’ 두 개가 논란을 일으켰다. 하나는 ‘세종 학생들의 고파스 사용 권리를 회수하자’였고, 다른 하나는 ‘세종 학생들은 동문인가’였다.
고파스 ‘호랭이광장’엔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으면 글이 묻히지 않고 보관되도록 하는 ‘추천게시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글을 모아둔 곳이다.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의 고려대 입학 인사도 여기에 있다.
‘세종 학생들의 고파스 사용 권리를 회수하자’는 내용의 ‘세종 캠 좀 쫓아냅시다’ 제하의 글은 추천게시판에 올랐다. 이 글의 조회 수는 약 2만6000건이었고 댓글 수는 500여 건에 달했다. 뜨거운 관심과 토론이 있었다는 증거다.
여러 학생은 ‘함께 이용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들은 “세종 학생들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므로 분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안암 학생들로만 제한하자’로 의견을 낸 학생도 적지 않았다.
한 재학생은 “안암과 세종의 관계는 삼성전자와 다른 삼성 계열사의 관계다. 같은 이름을 쓰지만 아무도 같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재학생은 “정기 고연전 때는 본-분교 학생이 뒤섞여 응원하는데, 같은 학교는 아닌가 봐요”라고 했다.
일부 학생은 입시 결과를 토대로, 본교와 세종 캠퍼스의 구분뿐 아니라 본교 내 의과대학과 다른 학과들의 구분도 논했다.
한 학생(팔○○○)은 본교 의과대학과 기타 학과를 각각 남자와 여자에, 세종 캠퍼스를 침팬지에 비유했다. 이어 “침팬지가 남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해도 인류로 묶일 수는 없다”고 했다. 다른 토론 주제에서도 학생들은 “차라리 연대가 더 가까운 학교” “이름이 같다고 같은 사람인가요” “범(汎)고려대 동문을 주장하시는 분들, 그럼 ‘고려마트’도 안고 갑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함께 이용하자’는 의견을 낸 학생들에게 일부 학생들은 “분교 학생은 괜히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본교 재학생 F씨는 “학교 안에서 본교-분교 운운하며 구분 짓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본교-분교 차별 문제는 실제 대학생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세종 캠퍼스 학생 G씨는 복수전공을 하러 안암 캠퍼스로 온 뒤 세종에서 활동하던 동아리와 비슷한 성격의 동아리를 찾았다. 첫날엔 회원들과 친해졌지만 얼마 뒤부터 차츰 배제됐다고 한다. G씨는 “동아리 간사가 ‘세종 학생들이 낄 수 없는 모임이 있다’고 했다. 내가 가입한 게 규칙을 일그러뜨린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동아리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G씨는 동아리를 그만뒀다. G씨의 세종 캠퍼스 친구들은 G씨에게 “안암에 가서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냐”며 핀잔을 줬다고 한다.
세종 캠퍼스 학생인 H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안암 캠퍼스의 음악 동아리에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다. 동아리는 세종 캠퍼스에서 서울까지 이동 시간이 만만치 않음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고 집합 시간을 정했다고 한다. H씨는 자주 지각을 했다. 선배들은 H씨의 동기들에게 “H의 지각 때문에 너희도 혼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H씨는 민폐를 끼치기 싫어 그만뒀다고 한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H씨는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여러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自淨 목소리도 많아
내부망엔 교내 학력 차별을 꼬집는 자정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등장한다. 본교 재학생들 중엔 세종 캠퍼스 학생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학생도 많다. 세종 캠퍼스 학생을 비난하는 의견이 내부망에 뜨면 반대 의견이 반드시 뒤따른다. “모든 문제를 본교-분교 이슈로 몰아가선 안 된다” “논점에서 어긋나는 세종 캠퍼스 관련 질문은 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다. “세종 캠퍼스 학생들에게 마음을 넓게 가지자”는 의견도 고파스의 추천게시판에 올라왔다.
한 학생은 “무조건 세종 캠퍼스 학생을 비하해본 적이 있으나 그것도 한때였다. 직장 상사가 세종 캠퍼스 출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남겼다. 다른 학생은 “학교본부가 분교의 특성화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암 캠퍼스에서 복수전공을 마무리한 세종 캠퍼스 학생 I씨는 “세종 캠퍼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면서 “그러나 수업시간에 학생들로부터 차별을 당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고려대 교직원 J씨는 “지금 ‘학점 전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거기에 쏠려 있다. 많은 학생은 수업시간에 자기 주변의 학생이 세종 캠퍼스 소속인지 누구인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김수한 교수는 본교 학생이 세종 캠퍼스 학생으로부터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음에도 종종 내부망을 통해 거친 언사로 공격하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잡음을 만들고 극단화에 나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교로 사람을 재단하는 학력 차별은 옳지 못한 일이다. 특히 인종, 성별과 함께 학력을 이유로 사람을 비난하는 건 금해야 할 일이다. OECD 국가들 중엔 입사지원서에 출신 학교를 써내지 못하게 하는 나라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명문대 학생들 사이의 본교생-분교생 차별 논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0대가 인터넷에서 별뜻 없이 즐기는 ‘구분 짓기 놀이’의 일종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학벌 특권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친다. ‘학교끼리 학력 차별하는 것도 모자라 학교 안에서도 학력 차별하고 공격하나’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취업난으로 학벌 스펙이 아무리 중요해졌다고 해도, ‘젊은 세대가 벌써부터 학벌주의를 대놓고 드러내서야’라는 평가를 들어선 곤란하다. 논쟁은 자유이지만, 논쟁의 격은 높여야 한다. 우리의 젊은 지성은 훨씬 크고 포용적인 가슴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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