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을 유지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던 직장에 계속 다닐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 이번 분석 결과 10년 전과 비교해 40, 50대 남성은 3명 중 2명, 60대는 4명 중 1명 정도만이 전문직이나 경영관리직 및 기술직의 직업을 유지하며 중산층 지위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 사라진 중산층은 어디에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사는 나모 씨(54)는 3년 전 증권회사 임원으로 재직하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해외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따고 증권사 서너 곳을 옮겨 다니면서 한때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그는 금세 일자리를 다시 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주식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금융권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1년 이상 소일하던 그는 모아둔 돈 5억 원으로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 창업에 투자했지만 이마저도 최근 문을 닫으면서 투자금을 모두 날렸다.
나 씨는 “올해 대학에 입학한 큰아들과 한 달 사교육비만 수백만 원인 고등학생 딸을 생각하면 집과 차라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제 기존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분석에서 조사 대상(남녀 20∼60대) 중 핵심 중산층을 유지할 수 있는 전문직과 경영관리직 및 기술직에 지난 10년(2001∼2011년)간 계속 종사한 비율은 56.34%였다. 나머지 43.66% 중 17.34%는 경제활동을 포기했고 12.31%는 자영업으로 이동했지만 성공했을 가능성은 낮다. 6.07%는 비정규직으로 이동하면서 소득수준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핵심 중산층 직업에서 고용주 계층으로 상향 이동한 비율은 2.43%였다.
일용직 근로자 등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으로 상향 이동한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비정규직의 단순 업무에서 정규직 중산층 직업으로 이동한 비율은 5.90%에 그쳤다. 비정규직 근로자 가운데 35.34%는 10년 만에 경제활동을 포기했다.
정년퇴직하는 50대와 출산으로 직장을 포기하는 여성들을 고려해 2001년 당시 30대 남성으로 범위를 한정해도 이런 추세는 달라지지 않는다. 2001년 당시 30대였던 남성들은 10년이 지난 뒤에 65.13%만이 기존 수준의 직장을 유지했다. 비정규직인 일용직 근로자에서 10년 만에 정규직 중산층 직업으로 이동한 비율도 5.06%에 그쳤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지난 10년간 고용의 안정성이 크게 후퇴하면서 중산층이 하위층으로 떨어질 확률은 크게 높아졌고 중산층 이상으로 상승 이동할 기회는 크게 줄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 ‘중산층 불안’의 원인은
S기업 입사 3년 차인 박모 씨(31)는 주변으로부터 ‘젊은 구두쇠’로 불린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통신사에 당당히 입사했지만 친구들에게 술 한잔 사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결혼 후에도 목돈을 모을 때까지는 부모님과 같이 살자고 여자친구를 설득하다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은 박 씨가 엄살을 부린다고 말하지만 그는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박 씨는 “입사하자마자 명예퇴직으로 고민하는 선배들을 보니 앞으로 10년 뒤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며 “그나마 지금은 회사 형편이 좋으니 명퇴를 해도 수십 개월 치 월급이라도 주지만 앞으로는 이런 혜택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젊은 중산층이 결혼을 미루고 소비를 줄이는 이유도 이번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 나이가 들수록 안정적이고 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을 유지할 가능성이 과거 선배 세대보다 크게 줄어든 탓이다.
2011년 기준 30대 중 핵심 중산층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47.01%지만 50대는 15.69% 수준이다. 40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약 31%포인트가 직장에서 사라졌다는 의미다. 2001년 당시 이 감소 폭이 20%포인트 정도였다는 것에 비하면 고용 안정성이 크게 후퇴한 것이다. ○ 중장년층, 질 낮은 일자리로
핵심 중산층 직업에서 이탈한 50대 이상 중 상당수가 직장을 다시 잡지 못하거나 재취업에 성공해도 낮은 임금의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것이 불안감의 요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직장에서 퇴직한 뒤 다시 일자리를 얻은 장년층 199만8000명 가운데 임시·일용직으로 재취업한 비율은 45.6%였다. 재취업자의 월평균 임금도 184만 원으로 20년 이상 장기 근속한 근로자 평균임금(593만 원)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취업정보업체인 인크루트의 서미영 상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로 재취업을 위해 프로필을 등록하는 50대가 급증했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이들을 위한 공개채용시장을 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최근 희망을 잃은 서울 강남의 중산층 가장이 가족들을 살해한 ‘서초동 세 모녀 살해사건’은 과거의 범죄와는 다른 패턴”이라며 “중산층의 불안이 장기화되면 사회정치적으로 불안 요인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중산층 통계기준과 체감기준 큰 차이 ▼
가구月소득 193만∼579만원 포함 “나는 중산층” 답변은 20% 그쳐
“주말에 브런치 정도는 먹어야 중산층 아닌가요.”
중산층의 정의에 대한 정확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중산층에 대한 정의는 소득 외에 삶의 질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직업, 소득 등에서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15명을 집단 면접한 결과 브런치나 해외여행 등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중간소득계층이다. 가구원 수를 고려해 가처분소득이 가장 많은 사람부터 가장 적은 사람까지 일렬로 세웠을 때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소득값의 50%에서 150% 사이의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통계청이 밝힌 2013년 가구당 한국의 중위소득은 386만 원이다. OECD 기준을 적용하면 월소득이 193만∼579만 원이면 모두 중산층으로 집계된다. 중산층 이슈를 둘러싼 더 큰 논란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든다는 점이다. 1980년대 후반에 전체 인구의 60∼80%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인식했다면 1990년대 중반에는 42%만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겼다. 2006년 한국사회학회 조사에서는 20%만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인식한다고 답했고 2013년 조사에서도 이 비율은 20% 안팎에 불과했다.
▼ 어떻게 조사했나… 6개 직업군 중산층 10년간 변화 추적 ▼
이번 연구는 1998년부터 조사가 이뤄진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 중 2001년과 2011년 자료를 토대로 6개 직업군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간의 한국 중산층 변화를 추적했다. 직업을 중심으로 변화를 추적한 것은 결국 한국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적정 수준의 소득을 올려야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 분석에서 자산 소득이 많더라도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60대는 안정적인 중산층에서 제외했다. 최근 2%대의 정기예금 금리로 한 달에 300만 원가량의 소득을 올리려면 세금을 고려하지 않아도 최소 18억 원 이상의 현금 자산이 있어야 하지만 이 같은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2012, 2013년 자료를 쓰지 않은 것은 지난 정부에서 자료 조사가 다른 기관으로 이전되면서 기준이 바뀌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자료는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조사해 올 상반기(1∼6월)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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