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글쎄요…. 집사 아닐까요. 그것도 종신형 집사. 만날 집에서 애 뒷바라지 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내가 요즘 하는 일만 보면 파출부와 뭐가 다를까 싶어요. 애가 나중에 커서 장가를 가더라도 계속 신경 써줘야 하고.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중학교 1학년생 아들과 돌 지난 딸을 키우는 최모 씨(41)는 “‘엄마’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딸을 낳은 뒤 육아휴직 중이다. 터울이 많이 나는 자녀를 키우면서 10여 년 전 육아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다시 경험하고 있다.
같은 질문을 받은 ‘남편’의 얼굴은 밝아졌다. 정보기술(IT) 기업 임원으로 재직 중인 김모 씨(39)는 엄마(그에게는 아내)라는 존재를 “올드 빈티지 와인”이라고 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와 향이 풍부해지는 존재가 엄마인 것 같다”며 “환경에 따라 가치가 크게 달라지는 점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고마운 동반자이자 아이들 성장 프로젝트의 공동 책임자죠.”
동아일보는 엄마와 가족들 100명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엄마는 ( )다’의 빈칸을 채워 달라고 했다. 엄마 자신과 남편들의 답변 중 공통적으로 나온 단어는 ‘슈퍼맨’과 ‘슈퍼우먼’이었다. ‘슈퍼우먼’은 대개 직장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감당하는 여성을 뜻하는 말이지만 심층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전업주부인 경우에도 이 단어를 썼다. 비슷한 맥락에서 ‘엄마는 가제트다’라는 재미있는 정의도 나왔다. 인기 만화 ‘가제트 형사’에서 주인공 가제트는 만능 팔다리로 초능력을 발휘해 온갖 사건을 해결하는 인조인간이다.
엄마들의 답변 중엔 집사, 잔소리 대장, 독재자처럼 부정적인 어감의 단어가 많았다. 엄마를 ‘밥’으로 정의한 직장맘 김모 씨(33)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늘 먹어야 하고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애들한테 깨지고, 남편한테 깨지고, 회사에선 불성실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회사 중견 간부인 김모 씨(52)는 ‘엄마는 동네북’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무조건 엄마 탓만 해요. 심지어 아이들은 ‘왜 나를 더 예쁘고 똑똑하게 낳아주지 않았느냐’ ‘돈도 없으면서 왜 서울 강남으로 이사와 친구들과 비교당하게 하느냐’고 따지죠.”
이 밖에 ‘신입사원’(열심히 하는데 칭찬보다는 지적을 더 많이 받아서), ‘감초 배우’(어디든 꼭 끼어 맛을 내지만 주인공은 아니므로), ‘트랜스포머’(나들이할 때와 집에서 아이에게 젖 물릴 때 모습이 너무 달라서), ‘하숙생’(하숙생이 주인 보듯 아이들을 힐끗 보고 출근하고 퇴근한 뒤에도 힐끗 보면 그만이라며)처럼 자조적인 응답도 있었다.
반면 남편들이 ‘엄마’(아내)에게서 떠올린 단어들은 동반자, 내비게이션, 오아시스 등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공무원 김모 씨(55)는 “친구이자 안식처”라고 답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대화가 잘 통하니 친구 같고, 사회생활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고 따뜻하게 품어줘서 안식처 같습니다.”
10, 20대 자녀들의 ‘엄마’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았다. “엄마는 전부다” “엄마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여대생 박모 씨(27)는 “엄마는 다른 어떤 말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 엄마’”라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자 가족에게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강모 씨는 엄마를 ‘거울’로 정의했다.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어요. 엄마의 성격이나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나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아요.”
이처럼 가족 구성원들이 각각 엇갈린 ‘엄마’의 정의를 내놓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상대에게 바라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순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남녀는 자라면서 집 안에서 봐왔던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배우자에게 기대하게 된다”며 “서로 기대하는 게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면 불만과 스트레스가 쌓인다. 서로 소통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을 통해 간극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