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집에서 가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퇴근 후 집에 가서 아이들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쟤들 밥 벌어 먹이기 위해서라도 회사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죠.”(이모 씨·32·회사원)
심층 인터뷰에 응한 엄마들 중에는 스스로를 ‘집안의 기둥’이나 ‘CEO(최고경영자)’ ‘왕’ ‘중심’ 등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모두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상을 말할 때 쓰는 용어들이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아버지가 리드하고 어머니는 뒷바라지한다’는 가부장적인 역할 분담이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릴 때부터 자립심과 독립심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 자란 30대 ‘알파걸’(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하거나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 엄마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이 도드라졌다.
공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32)는 신혼 초부터 남편의 지방 근무로 주말부부로 지내며 사실상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왔다. 김 씨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고 혼자 직장 생활을 해오다 보니 남편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다 할 수 있다’ ‘내가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는 “집 문제나 아이 교육 문제부터 가족 대소사까지 내가 챙기고 남편은 필요한 서류를 회사에서 출력해 오는 정도만 한다”고 말했다. 전업주부 최모 씨(34)는 “남편이 ‘너 없으면 안 된다. 네가 우리집 기둥이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너무 많은 책임을 내게 떠넘기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실제로도 나 빼고는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결정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40, 50대 주부 사이에서도 전통적인 ‘엄부자모(嚴父慈母)’의 역할 분담에서 벗어나 ‘내가 가정을 경영한다’고 답하거나 ‘내가 아이들에게 남편보다 엄하다’고 답하는 경우가 눈에 띄었다. 주부 김모 씨(40)는 “아이 훈육을 엄하게 하는 편이다. 아이들을 혼내는 사람은 엄마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남편에게는 ‘아이들에게 천사 같은 아빠로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주부 이모 씨(54)는 “엄마는 가정의 CEO다. 남자가 무능해도 엄마가 훌륭하면 그 집은 잘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1990년대부터 주부가 과학적 전문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가정을 경영해야 한다는 경영학적 인식이 한국의 가족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엄마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며 “여성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엄마 한 명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지우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도록 강요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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