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열정적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어울리고도 아직 이야깃거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한편 어느 때는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가 말을 끊고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 A는 유난히 그러한 욕구가 충만한 편이다. 어느 날은 고단한 몸을 가누지 못해 꼼짝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른하게 눈꺼풀이 감길 무렵 울리는 진동음에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A다. 짧은 순간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경험상 통화 버튼을 누르면 적어도 한 시간을 예상해야 했다. 지금 같은 몸 상태라면 통화 버튼이 곧 지옥행 버튼이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퍼져 있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를 하는 건 둘째 치고 듣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피곤한 몸이 아니더라도 대화는 보통 말하는 쪽보다 듣는 쪽의 에너지 소모가 더 큰 법이다. 그러니 방바닥에 늘어져 있던 나는 겁이 나 먼저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고민 끝에 받은 전화는 ‘좀 더 쉬다 통화할 걸’ 몰래 후회하게 만들었다. 통화 찬스를 얻은 묵언 수행자처럼 수화기 너머로 쉴 새 없이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A와의 통화는 어쩐지 장르영화의 공식처럼 매번 짜인 구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기승전’은 자신이 겪은 일상에 대한 넋두리로 가득하고, 전화를 마무리하는 ‘결’쯤에 이르면 어김없이 같은 걱정을 털어놓는다. “스프레이로 고정까지 해두었는데 땀으로 금세 앞머리가 휑해지고 말았어. 사람들이 다 내 머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니까.” 그 결말은 개그 코너에서 다루듯 마냥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는 탈모에 대한 고민이다.
가끔은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 보는 게 어때?” 혹은 “브루스 윌리스 같은 할리우드 배우처럼 근사하게 이발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얼렁뚱땅 해결책을 내놓으며 마무리를 시도하는 때도 있다. “그렇게 해봐야겠어”라고 다짐한 친구는 나중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진척 없는 시름을 하소연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매번 같은 소리를 반복해 듣고 있으면 속으로는 울화통이 터지게 된다. 하지만 그 고민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는지 알기에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 줄 수 없겠어?”라고 매정하게 굴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어째서 A는 다른 사람에게는 꼭꼭 숨기고 있는 사실을 유독 내게만 여과 없이 털어놓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내 이마가 무지 넓기 때문이다. 넓을 뿐만 아니라 한바탕 파도가 훑고 지나간 듯 삐죽빼죽 헤어라인이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전문용어를 빌려 이야기하면 ‘M자 탈모’가 되겠다. 이십대 중반 꽃다운 나이에 찾아온 신체적 콤플렉스로 나 역시 큰 좌절을 경험했다. 장고 끝에 시원하게 머리를 밀어 버리는 방법을 선택했고 지금은 넓은 이마를 가지고 먼저 농을 치는 여유까지 부리게 되었지만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식음을 전폐하던 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
내가 삭발을 통해 탈모의 스트레스를 덜어 냈다고 해서 같은 고민으로 근심하는 친구에게 역시 나처럼 머리를 밀 것을 강권할 수는 없다. 각자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가발을 선택하는 편이, 누군가는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는 편이, 누군가는 길게 기른 윗머리로 부족한 앞머리를 보충하는 편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데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내가 겪어 봐서 아는데, 잔말 말고 어서 삭발해!”라는 식으로 속 편하게 으름장을 놓는 건 어쩐지 조언이라기보다는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끼어든 심한 참견처럼 느껴질 뿐이다.
콤플렉스 극복 노하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주위를 보면 자신의 작은 성취를 앞세워 충고를 건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가끔은 이 세계에 한 가지 방향만 존재하는 듯 새로운 시도를 윽박지르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누군가를 섣불리 바보 취급하기도 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했다. 이 역시 상대를 위한 선한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세상엔 같은 방법으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그러니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은 채 물러서지 않는 강한 조언에 시달릴 때면 ‘조금 더 지켜본 후에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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