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대구에서 열린 ‘제7차 세계 물 포럼’ 개막식에서 박근혜 대통령 등 70여 개 나라에서 온 주요 인사들은 행사 시작을 알리기 위한 ‘자격루’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자격루 모양을 본떠서 만든 구조물이 통째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포럼은 물 관련 최대 국제행사로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열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였으니 국제적으로도 큰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최고 단계의 민감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경우의 일에서마저 이런 사고가 발생하였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고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 주는 조짐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는 사실보다도 이 일을 조짐으로 읽으려는 예민함 자체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차 더욱 난감한 일은 이보다 앞서 나타난 수많은 조짐마저도 민감성을 발휘하여 붙잡지 못하고 헛되이 흘려보낸 것이 이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나 세월호 등등은 이제 거론하기도 편치 않다.
우리에게는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일이 적지 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대표적이다. 행사 자체보다도 자원봉사자들이나 운영위원들의 헌신적 몰입도 단연 칭찬 일색이었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대해 예민함과 민감성을 발휘하여 몰입하고 헌신한 결과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크게 나아진 26년 후의 2014년 아시아경기는 역대 아시아경기 가운데 최악이라고 평하는 사람들까지 있게 되었다. 자원봉사자들과 운영위원들이 도박판을 벌이기도 하고, 셔틀버스가 오지 않아 선수들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거나, 심지어는 식중독 균이 있는 도시락이 제공되기도 했다. 도시락이 배달되지 않아 선수가 굶고 출전하는 일도 벌어졌다. 정전이 되거나 성화가 꺼지는 일이 발생했다면 거의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버린 것일까? 어떻게 되어 지금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자조가 우리 주위를 맴돌게 되었을까?
관은 관대로 민은 민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모두가 독립적 예민함을 상실한 것이 분명하다. 독립적 민감성이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를 비판하는 시민들은 자기가 바로 그 사회의 책임자임을 기억하는 예민함을 상실하였다. 비판하는 자기와 책임지는 자기가 한 몸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다. 국가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무능력과 구태의연함을 자각하는 예민함을 상실한 것이 분명하다. 그냥 월급쟁이 직장인이 된 지 오래다. 정치인들은 말해 무엇 하리. 이미 자신들이 어떤 수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부끄러움도 없고 염치도 없다. 모두 각자의 진영 논리에 빠져 진영이 제공하는 시각으로만 무장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에만 빠져 있다. 비판하는 자기와 스스로에 대한 책임성을 발휘하는 자기가 심히 분열되어 버렸다.
분열된 상태에서는 예민함이나 민감성이 발휘되지 못한다. 예민함이나 민감성이 발휘되지 못하게 되면 자각과 각성의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래서 몰입이나 집중이나 헌신이 도출되지 못한다. 윤리적 민감성이 사라진다. 지성이 발휘되지 못한다. 넓고 멀리 보는 시선은 꺾인다. 절제와 자제의 능력이 사라진다. 기품과 탁월함을 추구하려는 것보다 눈앞의 편향적 승리를 갈급해 한다. 모든 일을 진위 논쟁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각자도생하다가 사회는 분열되고 국가는 비효율 속으로 빠진다. 조선 말기가 딱 이랬다. 이런 상황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밤잠을 설쳤던 다산 선생은 결국 ‘신아구방(新我舊邦)’, 즉 낡아빠진 나의 조국을 새롭게 하자는 호소를 자기 스스로에게 깊이 새긴다. 핏기 없는 쓸쓸한 표정으로 남겼을 다음과 같은 경고를 조선의 말기는 들었어야 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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