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의 기자의 서울 데이트 할까요]세종마을∼석파정 ‘인왕산 문예길’

계곡 거닐다 윤동주 만나니 詩心 둥실

이철호 기자

‘시인 윤동주의 산책길이 서울 인왕산에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윤동주(1917∼1945)뿐이 아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인왕산(해발 338m)을 수차례나 화폭에 담아냈다. 여전히 아름다운 계곡과 한옥, 그리고 청년 윤동주의 시상(詩想)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인왕산 문예(文藝)길’을 21일 오후 찾았다.

문예길 데이트는 일명 서촌으로 불리는 ‘세종마을’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1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이곳의 맛집과 카페에서 든든히 배를 채우는 게 좋다. 이날 기자가 처음 들른 곳은 세종마을에 있는 현대 한국화의 거장 박노수 화백(1927∼2013)의 옛집.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는 이 집은 박 화백이 40년 넘게 산 곳이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윤덕영(1873∼1940)이 그의 딸을 위해 지었다고 전한다. 특히 한국과 서양식 건축술이 절묘하게 조화된 지붕의 아름다움이 유명하다. 미술관 뒤편 동산에 올라서 본 지붕과 세종마을 풍경은 “정말 아기자기하고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 집 서편 골목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수성동 계곡’에 이른다. 2012년 7월 노후한 옥인아파트 9개동을 모두 헐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 풍경을 복원했다.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이 살 만큼 서울에서 가장 건강한 자연환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어 계곡 뒤편에 이어진 ‘인왕산 자락길’을 타고 1.3km 걸어가면 부암동에 이른다. 가파른 계단길이 두세 곳 있지만 삼림욕을 하며 눈에 들어오는 경복궁과 청와대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인왕산 문예길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문학 예술 자연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데이트 코스다. 멋스러운 한옥으로 지어진 서울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에서 한 커플이 시를 감상하고 있다. 종로구 제공

숨이 가빠질 때쯤 종로구가 최근 한옥으로 조성한 ‘청운문학도서관’에 도착했다. 문학 특화 도서관을 표방한 이곳에는 문학 장서 9000권이 소장돼 있다. 특히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의 기와를 그대로 담장 기와로 재활용한 게 인상적.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기자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가져간 윤동주의 시집을 펼쳐봤다. 마치 담장 너머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그가 ‘서시’를 낭송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로 옆 ‘윤동주 문학관’에 가봤다. 옛 수도가압장을 재활용해 지은 이 건물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 사진, 관련 영상물이 전시 중이다. 특히 그가 생을 마감한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해 낸 제3전시실에서 영상물을 볼 때는 안타깝게 요절한 시인의 회한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아쉬움이 남으면 한양성곽 창의문 너머 무계원과 석파정으로 가면 된다. 과거 3대 요정(料亭)으로 불리던 ‘오진암’을 옮겨 지은 무계원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별장인 석파정 모두 근대 한옥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