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서울과 충남 아산, 전남 여수 등 충무공과 연고가 많은 지역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이어진다. 경북에는 이순신을 발탁하고 성장시킨 서애 류성룡(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성장)이 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이겨낸 영웅으로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배경에는 서애가 쓴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특별히 다룬 것도 작용했다. 마침 경북도는 미래창조과학부와 함께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서애의 삶을 가상현실 콘텐츠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는 서애가 임진왜란 7년을 기록한 ‘징비록’을 저술한 안동 하회마을의 ‘옥연정사’를 가상현실 콘텐츠로 만드는 것이다. 옥연정사(옥연서당)는 서애가 45세 때 하회마을에 지은 작은 집으로 57세에 관직에서 파직된 후 머물며 징비록(국보 132호)을 쓴 곳이다.
징비록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보통 말하는 징비록은 좁은 뜻으로 전체 16권 가운데 옥연정사에서 집필한 1, 2권을 가리킨다. 나머지는 전시(戰時) 정부를 이끌던 서애가 왜란 중에 선조에게 올린 건의와 제안 등을 담은 ‘근폭집’과 ‘진사록’, 8도 관찰사에게 보낸 문서 등을 담은 ‘군문등록’, 그 외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사상을 담은 1000여 편의 기록물로 돼 있다. 900여 편의 시(詩)도 있다.
서애가 남긴 기록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순신의 발탁은 신분을 떠나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서애의 확고한 신념에서 가능했던 하나의 사례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투선이 있습니다”는 구절은 매우 유명하지만 서애가 마주한 당시 조선 8도의 상황은 단 한 척의 전투선도 없는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재 발탁은 절박한 현실이었다.
서애는 이순신을 파격 발탁한 데 그치지 않고 왜란 한 달 전에 병법서(증손전수방략)를 이순신에게 보내 활용토록 하고 전쟁 중에는 끊임없이 격려했다. 이순신의 승전에는 서애의 이런 특별한 노력이 들어있다.
이순신은 해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지만 나라 전체로 볼 때 서애의 활약은 이순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고 높다. 서애가 병든 몸을 이끌고 전란 7년 동안 한결같이 동분서주한 모습은 근폭집이나 군문등록, 진사록을 통해 객관적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뛰어난 군사적 지식과 실천, 전시 상황에서도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한 민생(民生) 확보 등은 서애를 지탱한 유학(儒學)이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공부가 아니라는 점도 잘 보여준다. 서애가 벼랑 끝에 놓인 나라의 현실을 극복하는 큰 인물로 성장한 데는 스승 퇴계 이황의 영향도 매우 컸다. 서애는 낙향 후 퇴계의 문집을 정리하고 연보(일생을 기록)를 지었다.
경북도가 옥연정사 중심의 좁은 징비록을 넘어 서애의 삶을 폭넓게 담아 널리 공유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애 탄신일(음력 10월1일)이 국가기념일이 되도록 하는 것도 경북도가 관심을 가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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