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0시 37분경 서울 서초구 내곡동 육군 52사단 예하 예비군 부대 내 사격훈련장. 동원훈련 이틀째 사격훈련을 하던 예비군들의 시선이 사로(射路)에 엎드려 있던 최모 씨(23·사망)에게 집중됐다.
‘사격 개시’라는 구호에 따라 각 사로에서 예비군들이 수준유지사격(10발 발사)의 첫 발을 쏜 직후였다. 최 씨가 갑자기 뒤돌아 일어서 실탄이 장전된 K-2 소총을 바로 뒤에 앉아있던 다른 예비군(부사수)에게 겨눴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사격장은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최 씨는 옆 사로의 다른 예비군들을 향해 총격을 했다. 황모 씨(22) 등 4명이 머리와 가슴, 배 등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부상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쏟아졌고 사격장엔 유혈이 낭자했다.
사격장에 모였던 예비군 200여 명이 한꺼번에 대피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또다시 ‘탕’ 하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최 씨가 자신의 총기를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박모 씨(24)와 윤모 씨(24)는 치료 도중 숨졌다.
사건이 발생한 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대국민 사과 발표에 이어 중국을 방문한 김요환 육군참모총장(대장)도 현지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군은 부대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육군 중앙수사단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수사 인력 68명과 기무 헌병 인사 감찰 법무 등 5부 합동 조사단을 현장에 보내 감식과 부검을 하는 등 사건 경위 조사에 나섰다.
최 씨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통과 울분 등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전날 그는 자필로 쓴 유서에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절망, 타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2013년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최 씨는 현역 복무 당시 ‘B급 관심병사’로 분류돼 동료들의 집중 관리를 받았지만 이 같은 사실은 예비군 부대에 전달되지 않았다. 최 씨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훈련에 참가했다.
이번 사건은 예비군 사격훈련의 규정 미비가 빚은 ‘인재(人災)’라는 지적이 많다. 사고 당시 20개 사로에서 진행된 예비군 사격훈련의 통제요원은 위관급 간부 3명과 조교(병사) 6명 등 9명에 불과했다.
육군은 동원훈련을 담당하는 향토사단에서는 가용병력이 많지 않아 부대 지휘관의 재량과 판단에 따라 사격 통제요원을 운용한다고 설명했다. 훈련 인원을 고려한 통제요원의 배치 규모 등 관련 안전규정이 아예 없다는 얘기다.
사격절차 규정도 허술했다. 해당 부대는 실탄 10발이 든 탄창을 예비군들에게 지급한 뒤 가늠자 조정을 위한 영점사격(3발)을 하지 않고 곧바로 수준유지사격(9발)을 했다. 예비군의 숙련도가 높아 부대 지휘관이 영점사격을 생략했다는 게 육군의 설명이다.
영점사격을 먼저 실시하도록 하는 규정이 없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런 규정이 있었다면 추가 사격을 위해 탄창을 갈아 끼워야 해 만일의 사태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군 수사 관계자는 “사건 당시 최 씨의 사로를 비롯해 일부 사로의 총기를 고정하는 안전고리가 풀어진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고 전날 입소한 최 씨가 전날 부대에서 다른 예비군들과 충돌이나 불화가 있었는지, 개인적 분노를 품은 ‘묻지 마 범죄’인지 등은 군 당국이 풀어야 할 대목이다.
군 관계자는 “최 씨와 사상자 4명이 같은 중대 소속으로 확인됐다”며 “사건현장에 있었던 예비군들을 상대로 최 씨의 행적 등에 대해 진술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최 씨의 휴대전화 내용을 분석하는 한편 유족 진술을 토대로 범행 단서를 찾고 있다.
일각에선 예비군 훈련의 ‘느슨한 군기’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 예비군 사격훈련 시 군이 방탄복 등 보호장구를 제공하는 등 만전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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