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업종에 근무하는 박주진(가명·36) 씨는 지난해 말 1주일간 장염을 앓다가 강북삼성병원을 찾았다. 동네 병원에서 장염 치료제를 줬지만 낫지 않았기 때문. 내시경을 해 보던 주치의는 박 씨의 대장에서 암 조직을 발견했다. 그것도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상태였다.
박 씨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담배는 전혀 피우지 않고, 매일 헬스를 하는 ‘몸짱’이었다. 일 때문에 술을 마시긴 했지만, 폭음을 일삼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운동을 했기 때문에 폭식을 하거나 지나치게 기름진 것을 먹은 적도 없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버린 것이다.
주치의는 그의 가족력을 물었다. 박 씨의 아버지는 50대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돌아가셨다. 부모에게서 대장암이 나타난 경우, 자식의 발병률은 2∼3배 정도 높아진다. 박 씨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섯 살 난 딸아이와 아내 및 친척들이 공유할 수 있는 건강 생활 수칙을 알고 싶다”면서 “가족도 ‘대장암 가족력’에 대해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동아일보 건강 리디자인 문을 두드렸다.
○ 암 잡는 견과류? 사람 잡는 견과류!
대장암 관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다. 강북삼성병원 영양팀의 최경 과장은 12일 경기 김포시 박 씨의 자택을 방문해 가족이 실천할 수 있는 ‘영양 수칙’을 제안했다. 최 과장은 집안 살림을 맡아 주는 박 씨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고, 자택을 방문해 냉장고를 점검하는 식으로 컨설팅을 진행했다.
박 씨의 어머니는 마트에 들어서자 ‘견과류’와 ‘버섯’을 찾았다. 남편과 아들이 차례로 대장암에 걸리는 것을 보고 항암 음식을 찾게 됐다는 것. 견과류는 항암 효과가 뛰어난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간식 대신 먹으면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최 과장은 “견과류는 암을 잡지만, 잘못 관리하면 오히려 암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요새 마트에서 파는 대용량 견과류를 실온에 두고 먹는 경우 곰팡이가 피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곰팡이에는 ‘아프라톡신’이라는 발암물질이 들어 있어 위험하다. 견과류는 냉장 보관하면서 하루 한 주먹씩 작은 용기에 덜어 먹는 게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 재료보다 조리법이 중요
영양팀은 박 씨의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본 뒤 박 씨의 집을 방문했다. 본격적인 음식 점검도 시작했다. 박 씨 집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이 수북했다. 항암 치료를 받아 속이 자주 메슥거리는 그가 아이스크림을 자주 찾자 어머니가 가득 사 놓은 것. 하지만 항암 치료의 영향으로 체중이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은 일절 먹지 않는 게 좋다. 영양팀의 조언으로 어머니는 냉동실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모두 꺼내어 치웠다.
박 씨의 어머니가 꺼내 놓은 식재료 중에는 오리고기, 마늘, 고추, 브로콜리, 당근 등이 있었다. 대장암 치료 이후 불포화지방산을 섭취하기 위해 소고기나 돼지고기 대신 오리고기를 섭취한다는 것. 하지만 오리고기는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굽지 말고 삶아야 한다. 항암 치료에 좋은 마늘도 썰어서 고기와 구우면 영양소가 파괴된다. 조리하기 전 방망이로 마늘을 다진 뒤, 10분 정도 공기 중에 두었다가 음식에 넣는 것이 가장 좋다.
대장 건강을 위해서 보라색, 흰색, 붉은색, 녹색, 황색 등 5색이 고루 섞인 야채 모둠을 먹어야 한다. 이를 가장 간편하게 섭취하는 것은 아침에 주스 한 잔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하지만 야채의 즙만 짜내어 마시는 것보다는 갈아 놓은 건더기째 먹는 게 좋다. 즙만 마시면 식이섬유를 100% 섭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 과장은 “암 예방을 위한 재료는 준비가 된 상태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조리하면 소용없다”며 “발암물질이 포함된 탄 음식, 튀김류와 직화구이를 피해 식단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가족력 예방 첫걸음은 대장 내시경
일반적으로 대장암 검사는 50대부터 하라고 권장한다. 하지만 가족 중에 누군가 대장암에 걸린 적이 있다면, 나머지 직계가족들은 건강검진 시기를 20대부터로 앞당겨야 한다. 생활하면서 쌓인 습관에 의해 병이 발생했다기보다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빠르고 정확한 검진’이 최선의 예방책인 셈이다.
박동일 강북삼성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코디네이터를 통해 박 씨의 직계가족 중 대장 내시경 검진이 필요한 사람을 선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대장암 발병 요인을 지닌 가족을 찾아내 검진하도록 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별된 가족은 20세 이후부터 1, 2년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한다.
가족성 비용종성 대장암에 걸린 사람은 다른 부위에서 암이 나타날 확률도 높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족 역시 대장뿐만 아니라 위, 소장 등 검사를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특히 여성은 자궁내막암과 난소암에도 노출될 수 있으므로 질 초음파 검사도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
박 교수는 “가족력이 있는 경우 음식이나 운동 조절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암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결국 좋은 생활습관을 유지하면서 검진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가족력 암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 [주치의 한마디]대장암 걸려도 혈변-복통 없는 경우 있어 ▼
박주진 씨는 강북삼성병원을 찾았을 당시 대장암 2기와 3기의 중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동안 배변 활동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대장암에 걸리면 초기부터 혈변이나 복통, 변비 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환자는 1주일간 장염을 앓아 설사가 멈추지 않았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며 병원에 왔다. 내원 당일 검사해 보니 암 때문에 대장의 내강이 90% 정도 막힌 상태였다.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튿날 우측 대장 절제술을 통해 암 세포를 제거했고 16일간 입원하도록 했다.
박 씨는 아버지도 역시 비교적 이른 나이에 대장암에 걸린 바 있는 ‘가족력 경험자’다. 부모, 형제 등 직계가족 중에서 대장암 환자가 1명이 있으면 대장암 위험률은 2∼3배 증가한다. 만일 직계가족 중 2명이 대장암 환자라면 그 확률은 3∼4배가 된다. 특히 대장암 환자가 한 명이더라도 그 환자의 나이가 60세 미만이라면 가족의 대장암 위험률은 4배 증가한다. 대장이 일생 동안 축적된 식습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 기관인데, 암이 일찍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 유전적 소인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병원에서는 이 환자의 암 조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검사를 실시했다. 가족성 비용종성 대장암(HNPCC)이라는 유전병이 있으면, 대장 외에 소장과 여자의 경우 자궁내막, 난소, 요관 등에도 암이 잘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장 수술을 한 이후에 대장만 관리할 것이 아니라 복부 CT검사 등을 통해서 다른 암이 발생하는지도 추적한다.
또한 이 검사는 다른 가족의 암 예방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환자가 HNPCC에 해당한다면, 직계가족을 중심으로 대장 내시경을 받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중년 이후에 실시하는 편이지만, 유전적 소인이 강하다면 20세 이후 1∼2년마다 검사해야 한다.
환자는 지난해 수술한 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4년간 예후를 더 관찰해야 한다. 암은 수술한 이후 5년이 가장 중요하다. 환자의 식습관 개선을 돕기 위해 병원 측에서는 영양 전문가를 자택에 파견해 컨설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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