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췄다. 무동력 요트라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마침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김승진 선장(53·다큐멘터리 PD)은 돛을 내리고 ‘잠이나 자자’며 피곤한 몸을 뉘었다.
세계일주를 시작한지 174일째인 4월 11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사이 해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적도 부근으로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2마일(3.2km) 이내에 물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레이더 경고였다. 잠에서 깬 김 선장은 황급히 갑판 위로 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레이더 속 물체는 빠르게 다가왔다. 불안했다.
일반적으로 해적들은 어둠 속에서 몰래 다가와 서치라이트를 켜고 약탈할 배를 확인한다. 이어 갈고리를 던져 배위에 올라타 장비와 식료품을 약탈하고 선원들을 납치하기도 한다. 김 선장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요트의 모든 불을 껐다. 갑자기 3척의 배에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여러 개의 빛줄기가 바다 위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김 선장은 돛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들의 눈을 피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다행히 해적선들은 멀어져 갔다. 그제야 막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에서 6번째로 요트 세계일주에 성공한 김 선장이 16일 오후 3시에 충남 당진시 왜목항에 입항했다. ‘단독, 무기항, 무원조, 무동력 세계일주’로 지난해 10월 19일 왜목항에서 출항한지 210일만이었다.
항구에 발을 디딘 김 선장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떡진 채 귀를 덮은 머리와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서 그 간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있던 가족, 당진시개발위원회,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 안희정 도지사, 시민 등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배가 항구에 닿기 전부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딸 가은 양(18)은 아버지 품에 달려가 안겼다. “아빠 너무 말랐다….”
김 선장은 길이 13.1m, 높이 17m인 요트 아라파니호로 태평양~남극해~대서양~인도양을 모두 거치며 약 4만1900km의 항해를 마쳤다. 그가 도전한 여정은 바람에만 의지해 혼자 요트를 조종하되 항구나 육지에 기항하지 않는 항해다. 응급상황이 발생해도 외부 지원을 받아선 안 되며 항해 기간 내내 지구를 동서 중 한쪽 방향으로만 돌아야 한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턴이 처음 도전해 성공한 이후 지금까지 호리에 겐이치(일본·1974년), 제시카 왓슨(호주·2010년), 궈촨(중국·2013년), 아브힐라시 토미(인도·2013년) 5명만 성공했다.
김 선장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항해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름도 ‘희망 항해’라 붙이고 아라파니호의 우현에 ‘Sailing with Hope(희망 항해)’라는 글귀를 붙였다. 김 선장은 “나의 도전을 보면서 힘든 삶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많은 이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항해가 시작된 뒤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 건 출발 후 보름 만이었다. 돛의 넓이를 조절해주는 장치가 부러졌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돛을 조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어 냉장고가 고장 났고, 가스레인지는 양쪽 지지대가 떨어졌다. 풍력발전기는 기어가 마모돼 돌지 않았다. 그때마다 직접 고장난 부분을 수리해야 했다.
바다의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케이프 혼’을 통과할 때는 5일 내내 초속 18m의 강풍과 높이 7m의 파도와 싸웠다. 칠레 남단과 남극 사이에 있는 이 곳에서 배가 45도 가까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전복의 위기를 두 차례나 겪었다. 영국령 포틀랜드에 있는 사우스조지아 섬을 지날 땐 뿌연 안개 속에서 집채만 한 유빙을 피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김 선장은 “도와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했다.
900리터의 물과 7개월치 건조식품을 싣고 떠났지만 막바지에는 식량이 모자랄까봐 만새기 등 바닷물고기를 낚시해 먹었다. 생수가 아까워 샤워는 바닷물로 했다.
김 선장은 조만간 요트레이싱 팀을 꾸려 세계적인 대회에 도전할 계획이다. 그는 “나 스스로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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