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자녀를 낳고 결혼 관계를 파탄 낸 책임이 있는 배우자가 이혼 소송을 낼 수 있는지를 두고 대법원이 다음달 26일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을 열기로 했다. 그동안 혼인 관계를 깨뜨린 원인을 제공한 ‘유책 배우자’에겐 이혼 소송을 낼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례가 바뀔지 주목된다. 대법원이 이번 공개변론을 거쳐 유책 배우자의 이혼 소송 청구권을 인정한다면 이혼 소송의 패러다임이 전면적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혼외자녀를 낳고 15년 동안 별거하던 남편 A 씨가 부인을 상대로 낸 이혼 청구소송 상고심의 공개변론을 다음달 26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연다고 17일 밝혔다. A 씨는 1976년 결혼해 세 자녀를 뒀지만 늦은 귀가와 잦은 음주, 외박 등으로 부인과 불화가 심했다. A 씨는 결혼 생활 22년 만인 1998년 내연녀와 혼외자녀를 낳고 2년 뒤부터는 집을 나와 새 살림을 꾸렸다. 내연녀와 동거하면서도 본처에게 매달 생활비 100만 원을 주고 본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3명의 학비를 지원했다. A 씨는 2011년 신장 질환이 악화돼 본처와 그 자녀들에게 신장 이식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고 이혼 소송을 냈다.
A 씨는 동거녀가 병 수발을 들고 있는데다 둘 사이에 중학생인 자녀가 있어 더 이상 본처와의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며 이혼을 강력히 원했다. 반면 본처는 남편이 돌아올 거라 믿는데다 세 자녀 중 둘이 미혼이라며 이혼 요구를 거부했다. 1, 2심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 판례대로 결혼 관계를 파탄 낸 책임이 있는 A 씨의 이혼 청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상대 배우자가 혼인 생활을 계속할 뜻이 없으면서도 오기나 보복적 감정으로 이혼에 응하지 않을 때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 유책 배우자의 이혼 소송을 인정해왔다.
대법원이 이번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기로 한 건 최근 달라지고 있는 이혼 세태와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다. 기존에는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권을 엄격히 제한해 가정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강했지만, 최근엔 혼인관계가 이미 파탄 났고 사실상 복원 가능성이 없다면 이혼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이미 혼인관계가 사실상 깨졌다면 혼인 파탄의 원인 제공자가 어느 쪽인지를 따지지 않고 이혼을 인정해주고 있다.
이번 공개변론에는 이화숙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A 씨 측 참고인으로, 조경애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법률구조부장이 부인 측 참고인으로 나와 의견을 밝힐 예정이다. 국민의 생활상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판결인 만큼 모든 변론 과정은 법원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 한국정책방송(KTV)을 통해 생중계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