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입국한 탈북민은 약 2만8000명이다. 북한의 1개 군(郡)민에 해당하고 이 중 2008년 이후 입국자가 1만6000명에 달한다. 흥미로운 현상은 ‘70’이라는 통계수치다. 탈북민의 ‘70%’ 이상이 함경북도 출신에, 여성이며, 무직 부양 상태의, 20∼40대 청장년층이다. 무정부, 전쟁, 자연재난을 고리로 발생하는 난민과는 대비되는데, 두만강 접경 및 압록강변 혜산에서 비교적 탈출이 용이한 여성들이 극단적 기근이나 생활고를 피해 이탈한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탈북여성의 자녀 중 초등생 및 중학생 과반수는 중국인 아버지를 둔 비보호자들이다.
정부가 본격적인 탈북민 지원을 개진한 것이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점이었으니 그 역사도 어언 20년이 넘었다. 탈북민 정착 지원을 위해 상당한 재원도 투입되었다. 이제는 각계에 유명 탈북인이 등장하고 다양한 성공 사례도 발표된다. 그러나 여전히 도전과 과제가 많다. 미주와 유럽의 제3국으로 빠져나간 수백 명의 탈남자(脫南者)들과 함께 극소수이긴 하나 북한에 재입북하는 황당한 사례도 있다. 입국하여 수십 년간 뚜렷한 직업 없이 선동, 탈법으로 정부기관을 압박하며 이름을 알리는 정치화된 탈북단체장도 있다. 그래서 ‘탈북민은 곧 통일기둥’이라는 단순 논리가 솔직히 걱정스럽다. 전 세계에서 가장 활수(滑手)한 탈북민 정책을 펴고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대한민국 내에서 탈북민들은 ‘귀순 용사요 인권유린의 희생자로서, 북한 정권의 독재성과 악랄함을 웅변하는 사회행동가, 통일의 역군’이다. 남북관계의 교착 상황에서 김정은 정권이 탈북민들을 상대로 노정하는 히스테리도 이 분위기에 일조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탈북민 이슈는 ‘개인의 삶, 자립을 통한 인간적 행복 추구’보다는 ‘북한 인권 비판, 북한 정권에 대한 체제 우위 및 통일 역할론 부각’에 초점이 맞춰졌다. 여기에 탈북민에 대한 온정적 감상적 인식이 더해져 주거 및 정착지원금, 취업장려금, 기초생활수급권 부여와 함께 대학 특례, 등록금 면제 등 다양한 지원 보따리가 제공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탈북민들은 정착 과정에서 여전히 어렵다. 불만지수도 높다. 19개 정부 부처가 지원에 관여하지만 실질적 자립보다 이벤트성 단발성 중복지원에 그쳐 투입 대비 만족지수가 떨어진 탓이다. 그런가 하면 일부 탈북민은 ‘물고기를 나눠 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탈무드의 격언에 극단적 거부감을 표출한다. 소위 태아에서 화장(火葬)까지 지원받아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사고 때문인 것 같다. 이들은 북에서의 절대 빈곤에서 해방되었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 힘들어 할 때가 많다. 시장 경제에 적응하며 땀 흘려 노력하는 선량한 탈북민들보다 목소리 크고 정치화된 소수가 주목받는 웃지 못할 상황은 이미 관례로 굳어졌다. 반면에 탈북민 지원에 대한 우리 내부의 볼멘소리도 나온다. “양극화로 우리도 너무 힘든데…” 하는 역차별 논란이 그것이다. 심각하나 아무도 나서서 언급하지 않는 예민하고도 어려운 문제다.
탈북민 3만 명도 제대로 품지 못한다면 2400만 북한 주민과의 통일은 요원하다는 일각의 경고는 옳다. 탈북민을 통일 역군으로 키울 의무도 우리에게 있다. 단, 방법은 고쳐야 한다. 정치적 수사(修辭)나 전시성 균분 지원보다는 삶의 질을 개선하고 자활을 독려할 정책에 대해 고민할 때다. 물적 지원을 늘린다고 심리적 만족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과 취약계층 보호는 당연하지만 결과의 평등은 어불성설이다.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따라서 스스로 노력해야 살 수 있다. 통일 리더 운운에 앞서 시장경제하에서 자활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주자는 것이다. 자립이 안 되는데 어떻게 통일 역군이 될 수 있는가. 이미 생사를 넘나드는 탈북을 통해 강인한 저력과 DNA를 증명한 탈북민들이다. 20년 묵은 탈북민 지원의 시행착오를 반추하고 자활을 독려하는 방향으로 틀을 다시 짜야 한다. 그게 진정성 있는 북한이탈주민 지원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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