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아 기르려는 석지영(가명·21) 씨는 산부인과에 갈 때마다 기분이 찜찜하다. 초진 차트의 혼인 관계를 묻는 항목에 ‘미혼’이라고 적어 주치의와 병원 직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석 씨 같은 미혼 임신부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윤명희 새누리당 의원 등은 15일 ‘의료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의료인은 임산부를 진료하는 경우 환자의 혼인 여부에 관한 사항을 묻거나 이를 진료기록부 등에 기록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어기면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 법안에 대해 미혼모 등 한부모 가정은 적극 환영하고 있다. 한부모 가정의 상담과 교육 등을 지원하는 사단법인 한부모가정사랑회는 지지 성명을 통해 “산부인과 초진 차트의 혼인관계 항목은 사회적 편견을 경험하고 있는 이혼, 사별, 미혼인 임산부의 수치심을 자극한다”며 “임산부의 권익 보호를 위해 초진 차트에서 진료에 불필요한 혼인 여부, 배우자 등록 요구사항이 삭제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황의숙 한부모가정사랑회장은 “간통죄 폐지 등으로 혼외 출산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임신 관련 수술 동의서 등에 배우자 이름을 쓰는 병원도 있다. 배우자 대신 보호자를 쓰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를 중심으로 의료계는 반발하고 나섰다. 산부인과학회와 산부인과의사회는 윤 의원실에 보낸 의견서에서 “미혼 임산부의 경우 진찰 시 좀 더 주의가 필요하다. (혼인 여부에 따라) 질경(질에 넣어 검사하는 기구)을 비롯한 기구 사용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며 “(의사는) 미혼 임산부에게 생길 수 있는 질환에 대한 검진의 필요성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김광준 산부인과학회 대변인(중앙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은 “환자의 병력이나 결혼 상태를 아는 것이 환자 진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의사들을 대상으로 환자 정보 보호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면 혼외 임산부의 인권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을 떠나 혼외 출산에 대해 법적, 제도적 보호 장치가 확대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덴마크 등은 혼외 출산율이 50%를 넘는다”며 “우리는 결혼 출산 비중이 아직 압도적으로 높지만 저출산이 심각한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혼외 출산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신생아 43만6455명 중 혼외 출생아는 9322명으로 전체의 2.1%에 해당한다. 2003년 1.2%(49만543명 중 6082명)에 비하면 혼외 출생아 비율이 10년 새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 셈이다. 혼외 출생아 비율은 2005년 1.5%, 2007년 1.6%, 2009년 2%, 2011년 2.1%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