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발치는 총탄, 속절없이 쓰러지는 전우들의 비명과 고함….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30분의 교전이 끝난 참수리 357호는 참혹했다. 피 흘리며 신음하는 전우들을 챙기느라 내 몸에 박힌 파편의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북방한계선에서 발생한 제2연평해전 참전 용사인 권기형 씨(34·사진)에게 연평해전은 1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경북 구미시에 살고 있는 권 씨는 1일 영화 ‘연평해전’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모처럼 전우들과 희생 장병 유족들을 만나는 반가운 자리였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시사회가 끝나고 손수건을 손에 쥔 유족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만 살아 돌아왔다는 미안함, 전우를 끝까지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생존 장병들도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다.
상병이 된 지 얼마 안 돼 벌어진 전투 당일 권 씨는 동료 4명을 잃었다. 실종됐던 한상국 중사(당시 27세)는 나중에 주검으로 발견됐고 한 달 선임이던 박동혁 병장(당시 21세)은 84일간의 집중 치료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뒀다. 연평해전 때 무사했던 박경수 상사(당시 21세)는 8년 뒤 천안함 폭침으로 전사했다.
권 씨는 피 흘려 지킨 조국이 싫어 한때 호주로 떠난 적도 있다. “서해교전 용사라며? 그래 얼마 받았니?”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이 비수 같았다. 보수든 진보든 연평해전을 두고 벌이는 이념 논쟁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저 해군이니까 바다를 지켰고 전투가 벌어져 온 힘을 다해 싸운 것뿐인데….’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보상금과 이념 논쟁은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현충원이나 연평해전 추도식 행사에 갈 때면 자리 채우러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도 했다. 참전 용사라고 불러 놓고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의 ‘병풍 역할’만 시켰다. 유족은 뒷전이고 정치인 사진만 찍는 모습에 다시는 이런 행사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권 씨는 “우리 사회는 군복을 입고 눈감은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얼마 전 보훈처에서 겪은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백발노인 두 분이 ‘6·25전쟁 참전 전우가 죽었다’며 관에 함께 넣을 태극기를 받으러 왔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은 순서를 기다리라며 20분도 넘게 노인들을 기다리게 하더라는 것. “그분들이 그저 지나가는 노인이 아니잖아요? 그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많은 사람이 모르고 사는 것 같아요.” 권 씨는 “우리의 평온한 오늘을 위해 누군가가 자신의 내일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감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홍익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일명 ‘해피먼데이 법’을 발의했다. 현충일 어린이날 한글날처럼 날짜의 상징성이 크지 않은 공휴일을 월요일로 바꾸자는 법안이다. 현충일이 주말과 겹쳐 연휴가 짧아지는 것을 우려해 토-일-월 3일 휴일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국민이 좀 더 많이 쉬도록 하자는 데 반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해피’라는 말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권 씨는 “올해 현충일만큼은 1초만이라도 그분들을 생각하는 날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