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환경이 달라지니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됐다. 만나는 자리에선 자연스레 개인사를 이야기하게 됐는데, 나는 유독 “결혼은 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처음에 나는 “안 했다” 또는 “못 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면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 생겼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이들도 있었고, 그 자리에 함께한 다른 사람에게 “이 친구에게 좋은 사람 좀 소개해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자괴감이 들곤 했다. 궁리 끝에 이런 답을 찾아냈다. “아… 저, 아직 이혼 안 했습니다.”
부정확한 정보로 상대방에게 혼란을 주고 타이밍을 빼앗겠다는 계산이었다. 효과가 좋았다. 호구조사라도 나온 듯 질문을 퍼붓던 이들도 이 한마디면 기세가 누그러졌다. 아마도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는데 눈치 없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라는 고민에 빠진 것일 터. 나는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내심 쾌재를 불렀다. 거짓말도 하지 않고, 불편한 주제를 피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진 묘수인가.
사실 이 방법은 지난날의 과오에서 배웠다. 2년 전 가을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한과 복통이 느껴졌다. 오후가 되어도 차도가 없었다. 마땅히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를 가지고, 스스로 ‘장염’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결국 일주일 뒤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에서는 “왜 이렇게 병이 커지도록 놔뒀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큰 수술을 받고 두 가지를 깨달았다. 살아가는 데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낀 것이 첫 번째, 귀중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 두 번째 교훈이다. 그때의 교훈이 얼마나 절실했던지, 지금은 이렇게 불편한 대화를 피하는 데 응용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최근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초기에 벌어진 혼란상을 보니 이때와 비슷한 것 같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둔감한 나는 처음 ‘메르스’ 기사를 접했을 때만 해도 그저 하나의 소동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연일 사태는 심각해져갔고, 수많은 뉴스가 쏟아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매체마다 전하는 내용이 다른 때도 있고, 정부 기관마다 하는 말이 다를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에서도 환자가 나왔다” “△△으로도 감염이 된다” 같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정확한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보니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진 것이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질병이니까. 하지만 국가적으로 어떻게 대처하고 있고 개인은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지 등을 정부가 정확하게 알려주려고 과연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사태 초기부터 지금까지 병원이나 연구실, 대책본부, 현장 등에서 불철주야 이 사태와 싸우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타이밍의 문제를 묻는 것은 가혹할 뿐 아니라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보이는 곳에서 대응을 지휘하고 국민을 안심시켜야 할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분명 국민을 안심시킬 타이밍을 놓쳤다. 사태 초기에 누군가가 책임 있게 나서서 “지금 현재 몇 명의 환자가 발생했지만 현재 보건당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치료법을 찾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다못해 해법 찾기가 오래 걸린다면 “그동안 필요한 마스크와 손세정제가 부족할 테니 해외에서 긴급 공수라도 해오라”고 지시하는 이라도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정부기관을 이끌거나 정치 현장에 있는 분들이 타이밍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알면서도 안 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화가 나니, 차라리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일이다.
6일 오전 휴대전화로 정부의 ‘긴급재난문자’가 왔다. 이미 언론에서 수차례 거듭 보도한 메르스 예방 수칙 세 가지가 쓰여 있었다. 지난달 20일 첫 번째 확진 환자가 나온 이후 17일 만의 조치. 그러면서 한 번에 똑같은 메시지를 4개나 보낸 것은 늦은 타이밍에 대한 사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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