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김 과장은 장인이 하는 꽃게잡이 배 타고 있대.” “이 대리는 금융회사 들어갔다고 하더라. 잘됐지.” 이런 대화들이 간간이 오갔지만 대부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팬택 본사 대강당에 직원 수백 명이 모였다.
“더이상 기업으로서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기업회생절차 폐지 신청을….” 이준우 대표는 휴직자를 포함한 직원들을 불러 모아 ‘끝났음’을 밝혔다. 팬택은 이날 기업회생절차 폐지 신청을 해 청산 수순에 들어갔다. 다음 주 법원이 최종 결정을 내리면 직원 1200여 명은 전원 퇴사하게 된다. 이날 언론사와 법원, 채권단에도 같은 내용의 ‘사죄의 말씀’이 보내졌다.
같이 ‘공장밥’을 먹던 후배 한 명이 강당에서 문자를 보내왔다. “형님, 이제는 진짜 끝난 거 같아요.”
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팬택맨’으로 산 지 15년, 현대전자와 현대큐리텔 시절까지 포함하면 꼭 30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해온 나에게는 마지막 제품 생산 업무가 남아 있었다. 미국 이동통신사에 납품할 롱텀에볼루션(LTE) 모뎀 ‘스파크’ 제조를 위해 이날 경기 김포시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은 15명. 한때는 1400명이 돌아가며 24시간 가동하던 곳이다. 다들 별 내색 없이 작업을 이어갔다. 작업이 끝나자 김 차장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포즈를 잡으면서 생각했다. ‘진짜 끝인가?’
○ “거기가 뭐 하는 회사야?”
14년 전인 2001년. 누구도 명쾌한 답을 못했다. 회사가 팔려간다는데, 사가는 쪽 회사가 이름부터 생소했다. 현대전자로 입사한 현대맨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데 팬택?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우리를 인수한단다. 삼성전자와 LG전자, 그리고 내가 다니던 현대큐리텔이 당시 국내 휴대전화 시장의 ‘1부 리그’ 팀이라면, 팬택은 ‘2부 리그’에 속한 회사였다. 모를 법도 했다.
새 회사 사주인 박병엽 부회장이 술자리를 만들어 현대 출신을 불러 모았다. 팬택에 회장이 따로 없지만 스스로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쓰는 이유를 “매출 10조 원을 넘기면 회장을 달려고 한다. 여러분과 함께 이루고 싶다”고 설명했다. 자기의 꿈은 팬택을 세계 휴대전화 ‘톱5’로 키우는 것이라고도 했다. 술잔을 맞대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이 양반 꿈 하나는 끝내주게 크네.’
불과 석 달도 지나지 않아서 일이 터졌다. 미국 최대 휴대전화 유통회사인 오디오박스가 우리에게 제품 500만 대를 주문해왔다. 현대큐리텔은 물론이고 삼성전자나 LG전자도 받아본 적이 없는 주문량이었다. 수다쟁이 박 과장은 싱글거리며 “그거 알아? 원래 300만 대 주문이었는데 부회장님이 500만 대로 늘렸대”라고 떠들어댔다. 내가 만든 제품이 많이 팔려나가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현대전자에서 현대큐리텔로 분리되고, 다시 회사가 인수되면서 상처 났던 자존심은 120% 회복됐다.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이듬해부터는 다른 회사 이름을 넣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대신 우리 로고가 달린 휴대전화를 만드는 업무 비중이 늘어났다. 2004년에는 이천공장을 정리하고 김포사업장으로 생산라인을 통합했다. 승용차 두 대 길이의 트럭 수십 대가 장비를 옮기는 광경은 자못 장엄하기까지 했다. 시에서는 회사 앞을 지나는 국도 43호선을 두 배로 넓혀줬다. 어느 대기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사옥도 서울 상암동에 지어졌다.
공장 통합 기념으로 김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체육대회에서는 마티즈 자동차가 경품으로 걸렸다. 처음 당첨된 영업 담당 직원이 해외 출장으로 그 자리에 없었다. 추첨은 다시 진행됐고, 김포공장의 오랜 동료 허 차장이 행운의 주인공이 됐다. 첫 번째 당첨자에 대한 ‘동정론’이 일자 회사는 마티즈 선물을 두 대로 늘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런 좋은 기억들만 떠오른다.
○ “내 집이 생겼다”
10년 전. 공장에 출근하니 난리도 아니었다. 회사명보다 ‘스카이(SKY)’라는 브랜드가 더 잘 알려진 SK텔레콤의 자회사 SK텔레텍을 우리가 인수하기로 했다.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에서 1위가 됩시다.” 부회장님의 메시지는 현대큐리텔을 사들일 때인 ‘세계 톱5’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전혀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기술력은 좋았지만 라인업 구성이 부족했던 당시의 팬택에, 고급스러운 제품군을 자랑하던 스카이 인수는 금상첨화였다.
월급봉투는 두둑했다. 한때는 삼성전자 다니는 친구들과도 비슷했다. 이듬해 김포공장에 600명이 생활할 수 있는 기숙사가 지어졌다. 회사가 얻어준 근처 85채의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던 지방 출신 직원들은 “내 집이 생겼다”며 환호했다. 매출 3조 원을 넘긴 회사는 5조 원도 금방 달성할 것 같았다.
2005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모토로라 ‘레이저’가 2006년 세상을 휩쓸었다. 레이저의 인기는 휴대전화업계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6월에는 VK모바일이 망했고, 9월에는 지멘스 휴대전화 사업부문이 없어졌다. 스카이를 인수하느라 회사 빚이 너무 불어났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경영진들이 채권단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 시작됐다. 몇몇 동료가 휴직했고, 그중 몇몇은 회사를 나갔다. 팬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월화수목금금금’ 체제로 일했다. 다행히 ‘돌핀폰’ ‘레인폰’ 같은 제품들이 잘 팔렸다. 흑자 행진이 이어졌다. 워크아웃 중이었지만 시장 변화에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2010년 4월 15일 나온 ‘시리우스’는 삼성전자나 LG전자보다 앞선 국내 최초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스마트폰이다. 우리 회사는 경쟁사보다 늦으면 그냥 뒤처지는 게 아니라 바로 죽는다. 이런 위기의식이 원동력이었다.
지금도 내 손에 들려 있는 ‘베가 레이서’도 이때 첫선을 보인 제품이다. 세계 최초로 퀄컴의 듀얼 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한 스마트폰. 200만 대가 넘게 팔렸다. ‘이렇게 잘 팔려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손이 부족해 연구소 연구원들까지 파견 나와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2012년 1월 2일. 워크아웃 졸업 사흘 뒤 열린 시무식은 잊을 수가 없다. “50년 기업이 되자. 2015년에는 연 매출 15조 원 하자.” 이런 목표가 제시됐다. ‘한마음’이라는 거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때 우리가 진짜 그랬다.
○ “90만 원짜리가 15만 원에 팔려”
2년 전. ‘베레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때의 충격은 컸다. 우리 스마트폰 브랜드인 베가와 쓰레기를 결합한 조어다.
2012년만 해도 우린 잘나갔다. 워크아웃 졸업 후 1년간은 LG전자를 제치고 국내 스마트폰 시장 2위까지 올랐다. 갑자기 상황이 급변한 건 2013년 들어서다. 90만 원짜리 휴대전화가 15만 원에 팔리기 시작했다. 삼성이나 LG처럼 대규모의 보조금을 뿌릴 수 있는 여력이 회사에 없었다. 시장은 우리 규모의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머니 게임’으로 변해갔다. 해외에서도 애플과 삼성전자의 강세에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한때 10위까지 랭크됐던 북미 시장 스마트폰 제조사 순위권에서 회사 이름이 사라졌다.
그래도 기술을 믿었다. 삼성전자보다도 2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로 메탈(금속) 프레임을 적용한 ‘베가아이언’이 우리를 살릴 거라고 기대했다. 금속 재질 특성상 발생할 수 있는 전파 혼선 때문에 아예 프레임을 안테나로 쓰는 새로운 방법을 택했다. 이 개발을 맡았던 직원 때문에 119와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다. 밤새 연구실에서 개발하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출근한 청소 아주머니가 깨워도 미동을 안 해 죽은 줄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열심히 했다.
확실히 제품은 좋았다. 그런데 패착이었다. 이미 이동통신 시장은 LTE-A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일반 LTE 제품인 베가아이언에 지나치게 시간을 쏟은 탓이다. ‘베가 LTE-A’는 이런 조급함 속에 만들어졌고, 처음으로 베레기로 불렸다. 과열 경쟁을 벌인 이동통신사들이 영업정지에 들어가면서 시장마저 얼어붙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임금이 줄고, 동료들도 줄었다. 박 부회장이 물러났고 두 번째 워크아웃이 시작됐다. 새 제품을 꾸준히 만들었지만 공장에 재고로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동통신사에 망 연동 시험을 위해 제품을 보내려는데 “삼성전자 새 폰 때문에 일정이 늦춰졌으니 나중에 보내라”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후배들의 휴직원 결재를 해야 했다. 정확히 546명의 휴직원에 서명을 하다보니 처음으로 우울증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이후 10개월간 이어진 잔혹한 ‘희망고문’은 나와 동료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찢어놨다. 알 만한 기업은 우리를 사려고 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인수 희망자들이 등장하면 실낱같은 희망을 품다가 ‘역시나’ 하는 일이 반복됐다.
○ “너무 큰 꿈을 꿨던 걸까…”
나는 기업회생절차 폐지 발표가 있고도 5일을 더 일해 스파크 모뎀 생산을 끝냈다. 그리고 31일 김포공장 생산동을 내 손으로 ‘셧다운(가동중단)’시켰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시장은 냉철하고, 우리의 실패는 누구의 탓도 아닌 실력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인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 끝나다니. 허무할 뿐이다.
14년 전의 내 질문에 스스로 답해본다. 팬택이 뭐하는 회사냐고?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를 만든 회사다. 겁내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던 회사다. 어쩌면 조그만 덩치에 너무 큰 꿈을 꿨던 곳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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