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임보미]어린이집 ‘얼굴도장’ 찍기 내모는 ‘11일 의무출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7일 03시 00분


[메르스 파장]11일 못채우면 보육료 지원 깎여
文복지 “잠정해제”… 현장은 팔짱
학부모들 편법 출석체크 속앓이

임보미·사회부
임보미·사회부
서울 강동구에 사는 전업주부 이모 씨(36)는 최근 매일 오전 9시 30분경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에 22개월 된 딸과 함께 간다. 교사를 만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딸 친구들의 출석 상황만 간단히 살핀 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어린이집에 ‘얼굴도장’만 찍고 돌아오는 이유는 보육료 때문이다. 어린이집은 아이가 월 11일 이상 출석한 상황을 보육포털시스템에 등록해야 정부보조금을 전액 지원받는다. 하지만 메르스 확산 이후 ‘11일 규정’을 채우지 못한 어린이가 늘었다. 이 씨는 “어린이집에서 엄마들에게 ‘집에서 아이를 돌보더라도 아이가 잠시 들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며 “앞으로도 11일을 채우려면 며칠 동안은 ‘아침 산책’을 계속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메르스 확산으로 이런 어린이집 ‘얼굴도장’ 찍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어린이집은 아예 16일 학부모들에게 ‘11일 이하로 출석해도 전원 11일 이상 출석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동의서를 보내 서명을 요구했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학부모들의 ‘내부 고발’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뜻이다.

편법과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현장 대책은 없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8일 국회에 출석해 “어린이집 의무출석일수 규정을 당분간 해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행되지 않고 있다. 복지부의 한 당국자는 “추이를 봐서 검토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출석일수 규정을 해제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지원금 부당수령 논란 등 메르스 이후 공무원들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보다는 연이어 구멍난 방역망을 보며 어린 자녀의 안전을 걱정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장관이 국민의 대표 앞에서 했던 약속이 실무 공무원 선에서 뒤집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서류상의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국민 불안을 무시해도 된다는 듯한 태도는 누구도 용납하기 어렵다. 억지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는 한 어머니는 “메르스 사망자 수가 늘어 불안한데도 이런 선택을 하고 있어 고통스럽다”고 전했다.

임보미·사회부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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