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9월 초 오재희 당시 주일 대사는 일시 귀국했다.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오 대사에게 “한반도와 국제 정세로 볼 때 한일정상회담이 필요하지만 국내외 사정으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건의조차 못한다”고 말했다. 한 달 전인 8월 한중 수교의 여파였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손잡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해 11월에는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처음으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방한이 예정돼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9월 뉴욕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도 만날 계획이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주변 강대국 가운데 일본 정상만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1991년 12월 이후 한일 간 현안으로 떠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오 대사는 친구 사이던 이 장관에게 “그럼 내가 한번 각하에게 정상회담을 하자고 떼를 써 보겠다”고 말했다. 오 대사는 대통령비서실을 통해 면담을 신청한 뒤 노 대통령을 독대했다. 1991년 오 대사가 일본에 부임할 때 “일본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내가 이미 한 번(1989년) 일본에 갔는데 또 가야겠느냐”고 했던 노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에게 오 대사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현안이 없어도 매년 정상회담을 하면서 양국 화해를 촉진했다”는 예를 들며 정상회담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일정 수첩을 꺼냈다. “오 대사 운이 좋군. 내가 그만두는 내년 2월까지 11월 7일과 8일 딱 이틀만 일정이 비어 있소.”
그렇게 성사된 한일 정상회담이 그해 11월 8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열렸다. 이후 외무부 차관을 지낸 오 전 대사(83)는 “회담 다음 날 일본 언론들이 ‘역시 한국이 일본의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고 대서특필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여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전했다. 그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한일협정 협상에 참여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과거사 인식에서 퇴행을 거듭해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상대해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1992년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일 전략으로 일본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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