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비운의 창의문’ 옛길 제모습 찾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2일 03시 00분


종로구, 130m 2015년말까지 복원
‘경복궁 누르는 형국’ 짓자마자 폐쇄… 인조반정-김신조 1·21사태 루트로
사람들 무관심속 문루 등 원형 간직

서울 세종대로에서 경복궁과 청와대를 오른쪽에 끼고 부암동으로 오르는 좁은 언덕길. 이 길 끄트머리 북악스카이웨이 고가도로가 하늘을 가리는 지점에서 오른쪽을 보면 오랜 성벽 위 기와지붕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 아니면 지나치기 쉬울 만큼 외진 곳. ‘창의문(일명 자하문)’은 600년 넘게 이곳에 서 있었다.

한양도성 4소문(小門) 중 북서쪽에 있는 창의문은 ‘비운의 문’이다. “경복궁을 누르는 형국이니 문을 닫는 게 좋다”는 풍수가들의 주장으로 만들자마자 폐쇄됐다.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고 이름만 문인 세월만 200년. 이랬던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역사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1623년 3월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과 장단부사 이서 등이 이끈 반정군 1500명은 창의문을 뚫고 도성으로 진격했다. 평소 인적이 없어 방비가 약한 점을 노렸다. 야밤 침투는 한 차례 더 반복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창의문 옆 도로를 넘어 청와대로 돌진한 것.

곡절 많은 창의문이 요즘 재조명받고 있다. 18일 서울 종로구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만난 박상빈 한양도성연구소장은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 제물포(인천)와 한양을 잇는 상업 길로 도성 문 중 가장 번화했던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달리 창의문은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이 문에서도 가장 가치가 높은 건 성문 위 단정히 서 있는 문루(門樓)다. 박 소장은 “2008년 숭례문이 전소된 이후에는 1741년(영조 17년)에 만든 창의문 문루가 도성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며 “과거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던 게 문을 보존하는 데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성문’으로서의 창의문의 가치도 주목 받고 있다. 박 소장은 “창의문 밖 평창동의 이름은 조선 후기 5군영 중 하나인 ‘총융청’의 군량창고로 쓰였던 ‘평창(平倉)’에서 유래한 것”이라며 “조선 후기의 창의문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군사 통로의 역할도 매우 컸다”고 분석했다.

종로구는 올 12월까지 창의문 앞 옛길 130m 구간(창의문로 10길)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원래는 “골목길이 좁고 불편하다”는 주민 의견을 반영해 단순히 길을 넓히고 아스팔트 포장만 새로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지적도와 골목을 비교해본 결과 창의문 옛길과 지금 골목이 거의 동일한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종로구는 아스팔트 대신 황토색 포장재를 깔아 최대한 옛 풍경을 다시 살리기로 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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