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냘픈 목과 깡마른 팔다리를 가진 발레리나는 잠시 잊어도 좋다. 그림 속 발레리나는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 닮은 듯한 듬직한 다리, 복부비만으로 튀어나온 뱃살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번쩍 들어올린 유연한 자세가 이보다 안정적일 수 없다. 푸근해서 더 매력적인 발레리나와 마주친 순간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된다.
▷어제 서울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한 페르난도 보테로(83) 전의 ‘발레리나’란 작품이다. ‘블랙 스완’으로 2011년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내털리 포트먼은 발레리나 배역을 위해 9kg이나 살을 뺐다. 아무리 날씬한 여배우도 혹독한 다이어트를 거쳐야 할 만큼 발레리나는 아름다움을 위한 감량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한데 콜롬비아 태생의 세계적인 거장인 보테로는 이런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뒤집어 정감 넘치는 발레리나를 그렸다.
▷그의 그림이나 조각은 서명이 없어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다. 풍만한 형태와 화사한 색감이 공통분모다. 인체는 물론이고 동물과 악기 같은 사물까지 공기를 주입한 듯 둥글둥글 부풀려진 모습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난 뚱뚱한 여인을 그리는 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단지 양감(量感)의 아름다움, 형태의 관능미를 표현하는 데 관심을 쏟을 뿐이란다.
▷해마다 7, 8월에 10, 20대 여성 빈혈 환자가 급증한다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비키니를 멋지게 입기 위한 무리한 다이어트로 생긴 ‘비키니 빈혈’이다. 젊은 여성이 아니어도 이맘때면 ‘살과의 전쟁’을 치르는 인구가 부쩍 늘어난다. 보테로는 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감성을 표현한 작품을 통해 재미와 행복을 선사한다. 2009년 서울에서 열린 첫 개인전이 입소문을 타면서 20만 관객을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지식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보테로 작품전. 그림 속 주인공은 다들 무덤덤한데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편안하고 즐거워진다. 메르스로 기진맥진한 우리에게 필요한 생의 활력을 충전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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