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아 진행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제937호는 15일 도착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오후 8시 15분(현지 시간)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들어왔다. 광복절을 상징하는 듯한 시간이었다.
출정식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 역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점을 상징하는 표시탑이 서 있다. 탑 중앙부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를 상징하는 ‘9288(km)’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준 열사의 외증손자 조근송 씨(60)는 “선조들이 두만강을 건너오던 길을 우리는 돌고 돌아서 왔다. 친선특급이 통일과 민족의 미래를 향한 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런 염원을 담은 열차는 오후 9시 38분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떠나 13시간 거리에 있는 하바롭스크로 향했다.
앞서 친선특급 참가자 222명은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의 전진기지였던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사법·행정 기능을 갖춘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돼 항일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우수리스크 라즈돌나야(쑤이펀) 강가에는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우뚝 서 있었다. 화강석으로 된 유허비는 폭 1m, 높이 2.5m의 기둥 모양이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세웠다. 선생은 1907년 고종의 특명을 받고 이준 열사, 이위종 선생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후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연해주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규합해 군대를 편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7년 47세의 나이로 숨진 선생은 “광복을 이루지 못한 내가 어찌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몸과 유품을 모두 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허비는 그의 뼈가 뿌려진 라즈돌나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다. 당초 ‘한국의 흙’을 가져와 유허비 앞에 놓고 위령제를 지내려 했지만 세관 통과 문제로 흙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 대신 국내산 녹차를 유허비 앞에 올렸다. 판소리 명창 서명희 씨(52·국악단 소리개 이사장)는 ‘당신의 노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전통음악을 불렀다. 서 씨는 “모두가 잊고 있던 영웅의 죽음이 떠올라 감정이 요동친다”며 눈물을 보였다.
유허비에 헌화를 마친 참가자들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총살되기 전까지 2년여간 머문 고택으로 이동했다. 어린 시절 연해주로 이주해 기업가로 성공한 뒤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 선생은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특히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사의 재종손 안현민 씨는 “최 선생은 우리 가족에겐 정말 고마운 분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지낸 집을 보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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