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 백수읍 천정리 천기마을은 농사짓는 27가구가 수십 년간 오순도순 모여 살아온 시골마을이다. 서로 집안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을 만큼 한 가족처럼 지내온 농부들은 농사를 시작할 3월부터 돌연 불화에 빠졌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주민들 사이에선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편을 갈라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웃사촌 간의 반목은 “죽여버리겠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심해졌다.
사건은 모내기에 쓰려고 논길에 쌓아둔 비료포대 때문에 불거졌다. 마을 주민 A 씨가 3월 18일 오전 11시경 50cc 오토바이를 타고 왕복 2차로 논길을 지나다가 오른쪽 길가에 쌓인 비료 90포대를 들이받고 사망했다. 주민들이 4월 초 모내기에 쓰려고 논 옆 길가에 매년 관행적으로 쌓아두던 비료포대를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무심코 비료포대를 길가에 쌓아뒀던 전모 씨(75) 등 동네 농부 3명은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기소 의견으로 광주지검에 송치됐다.
전 씨 등 3명은 “매년 해오던 대로 논 옆 길가에 포대를 쌓아둔 것뿐인데 이게 왜 벌을 받을 죄가 되느냐”며 반발했다. 도로교통법에는 교통에 방해가 될 만한 물건을 도로에 내버려두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온 70대 농부에게는 이웃사촌의 죽음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다. 피해자 유족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자 격분했다. 고요하던 마을을 뒤흔든 사망 사고에 주민들까지 감정싸움에 휘말렸다.
사건을 넘겨받은 광주지검 형사2부(부장 조기룡)는 단순한 형사처벌보다는 마을의 실질적인 평화 회복이 관건이라고 판단해 형사조정을 시도했다. 형사조정은 범죄사실이 가볍거나 민사 분쟁에 가까운 사건에 대해 전문위원들이 당사자 간 합의를 이끌어내 피해보상 등을 중재하고 검찰은 기소유예 등을 통해 형사처벌하지 않는 제도다. 당사자가 모두 노인이라 검찰이 전남 영광군 백수읍으로 직접 가서 조정을 시도했다.
김용배 광주지검 형사조정위원회 운영실장(58) 등 6명은 지난달 24일 백수읍사무소에서 피의자인 전 씨 등 3명과 피해자 차남을 불러 2시간 30여 분 동안 ‘마라톤 중재’를 했다. 처음엔 차남이 “우리 형이 한마디 사과도 없는 가해자들을 직접 보면 죽이고 싶어질 거 같다고 해서 내가 대신 왔다”고 말했을 만큼 분위기가 험악했다. 김 실장이 비료포대를 쌓아둔 게 왜 처벌 대상인지 끈질기게 이해시키자 전 씨 등이 비로소 사과했다. 전 씨 등 3명이 총 900만 원을 물어주고 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장례비 3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형사조정의 힘은 합의 사흘 뒤에 더욱 빛을 발했다. A 씨 부인이 광주지검으로 전화를 걸어 “피의자들 모두 남편과 평생 호형호제했던 이들인데 사과받은 걸로 만족한다”며 합의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검찰은 전 씨 등 3명을 기소유예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사연을 들은 김진태 검찰총장은 17일 천기마을 마을회관에 대형 시계를 기증했다. 김해수 광주지검장은 조기룡 광주지검 형사2부장을 통해 마을에 돼지고기와 떡, 막걸리를 보내 마을 주민의 화합을 축하하고 최 씨 유족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 부장검사는 “형사조정 없이 처벌만 했다면 자칫 마을공동체가 비료포대 때문에 파괴될 수도 있었다”며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형사조정 덕에 마을 전체가 화목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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