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과목은 절대 손 못대” 학계 밥그릇 싸움에 학생만 멍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3일 03시 00분


[누더기 교육과정, 이번엔 제대로 바꿔보자]<2>교과 이기주의

교육과정 개편이 논의될 때마다 특히 수학 과목은 ‘학습 부담 증가’로 논란의 중심이 됐다. 정부는 교육과정 개편 때마다 수학 학습량을 줄였다는 입장이지만 학교 현장의 교사, 학생, 학부모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학생들이 수학 참고서를 살펴보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교육과정 개편이 논의될 때마다 특히 수학 과목은 ‘학습 부담 증가’로 논란의 중심이 됐다. 정부는 교육과정 개편 때마다 수학 학습량을 줄였다는 입장이지만 학교 현장의 교사, 학생, 학부모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학생들이 수학 참고서를 살펴보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수학 과목 학습 부담 경감은 교육과정 개정 때마다 중점 사항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지만 대안은 항상 대동소이했다. 학습내용의 범위는 상하좌우 자리 이동과 약간의 삭제만 있을 뿐 별다른 것이 없었다.”(정규성 경기 군포고 수석교사)

“이번에 발표될 2015 개정교육과정은 학습 부담 경감의 정도가 극히 미미하고, 이전에 삭제된 부분이 오히려 추가된 것도 있다.”(배숙 경기 청덕중 수석교사)

“통합사회 내용 체계표를 보면 도덕, 지리, 일반사회에서 다뤄지는 주요 내용요소와 핵심개념들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이승우 서울 동명여고 교사)

교육과정을 바꿀 때마다 정부는 “학생의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해 왔지만 막상 새 교육과정이 적용되면 오히려 학습 부담이 늘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문제의 이면에는 교육과정 개편을 둘러싼 각 과목의 학계와 관련 집단의 ‘교과 이기주의’가 있었다.

○ 학계 이기주의에 끌려다니는 교육과정 개편


이달 초 만난 한 정부기관 관계자는 “처음에는 교과내용을 줄이자고 시작해도, 막상 과목별로 의견을 수렴하고 덜어내야 할 내용을 결정할 시기가 오면 과목 관계자들과 학회에서 난리가 난다”고 말했다. 과거 교육과정 개편에 참여했던 그는 “한림원 등 학회는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학습량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과서에서 특정한 주제를 넣고 빼는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가령 수학과목 안에서는 함수, 미분, 적분, 벡터 등 다양한 주제가 다뤄진다. 각 대학에서는 수학과나 수학교육과에 각각의 주제를 전공하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다. 또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교수들끼리 모인 학회가 있다.

초중고교 교과과정에 포함되는 학습내용은 당연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범위에 해당하고, 관련 주제와 내용을 연구하는 교수진, 교사는 수능 출제위원으로 참여한다. 전국 초중고교생이 배우고, 대입에서도 다뤄지는 내용인 만큼 관련 분야는 연구진이나 교사 양성도 활발히 이뤄진다. 반대로, 특정 주제가 초중고교 교과과정에서 빠지면 관련 학회와 대학의 관련학과, 교수들은 이런 기득권을 상실한다. 사범대 졸업생의 진로와 교원 수급 규모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계는 사활을 걸고 ‘교과 이기주의’를 보일 수밖에 없다.

교육부가 9월 중 발표할 예정인 통합사회, 통합과학도 결국 이런 교과 이기주의 때문에 당초의 취지를 잃고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래 취지는 가령 생물의 광합성을 가르치면서 화학, 물리, 지구과학의 요소를 연계시켜 가르치자는 것. 이 과정에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분량 조절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각 학계에서는 반발이 일었다. 그 결과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통합과학은 ‘융합형’이 아니라 기존의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단원별로 나눈 ‘병렬식 구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통합사회도 학습 분량이 늘어났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2015 교육과정 시안을 자체 분석한 결과 “현재 사회과목에 비해 학습 부담이 약 5.5배 늘어날 것”이라고 평가했다.

○ 교사 참여 비중 확대―독립적 기구 논의해야

교육과정 개편을 총괄하는 교육부가 주도해 교과내용을 줄이면 될 것 같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교육부 관계자는 “막상 내용을 줄이려고 하면 학회 교수들이 정치적인 ‘칼질’이라고 비판하면서 심하게 반발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교육과정 개편의 중심축을 교수에서 교사로 옮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계의 입장이 아니라 실제 학생을 가르치고, 수업의 난이도를 체감하는 교사들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 최수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현재 교육과정 개정 논의에 참여하는 인력은 교수가 60∼70%, 교사가 30∼40% 정도”라며 “교사들은 교수에 비해 대부분 나이도 어리기 때문에 실제 논의 과정에서는 발언권이 훨씬 약하다”고 비판했다. 교육과정 개편은 보통 교수가 개발을 하고 교사가 검토를 하는 식으로 이뤄지는데 교사의 비판이나 지적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사의 참여 비율을 절반 이상으로 늘리고, 교수가 주축인 교육과정 개발을 교사 중심으로 바꾼다면 학계의 이기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독립적인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방안도 나온다. 교수, 교사, 학생, 학부모, 시민단체, 정부 관계자 등 다양한 구성원이 모인 기구에 최종적으로 교과과정에 필요한 부분과 덜어낼 부분을 가려내고 결정할 강력한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것. 교사단체 좋은교사운동은 “국가교육과정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해 독립적으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교육과정 개편을 논의할 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방안은 구체적으로 누가 참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또 학계의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은택 nabi@donga.com·임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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