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이광표 기자의 문화재 이야기]영월 청령포 관음송이 들려주는 ‘단종의 최후’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9일 03시 00분


문화유적답사, 제대로 즐기는 법
②인물 스토리에 빠져 보기

답사를 갔을 때, 호기심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문화유적에 얽혀 있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토리의 핵심은 역시 인물. 주인공의 사연이 드라마틱하면 그와 연결된 문화유적 역시 절로 흥미로워지겠죠.

단종 유배 생활의 슬픔을 그대로 지켜본 영월 청령포 관음송(천연기념물 349호).
단종 유배 생활의 슬픔을 그대로 지켜본 영월 청령포 관음송(천연기념물 349호).
○ 단종과 영월

산 깊고 물 좋은 곳, 강원도 영월 땅. 조선시대 6대 왕 단종(1441∼1457)의 애절한 흔적이 도처에 가득합니다. 청령포(淸령浦), 관음송(觀音松), 관풍헌(觀風軒), 자규루(子規樓), 장릉(莊陵)…. 영월에 가면 먼저 배를 타고 청령포에 들어가야 합니다.

▽단종은 왜 영월에 묻혀 있을까

1452년 단종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6월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됐어요. 그리곤 그해 10월 불과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단종의 시신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단종이 묻혀 있는 영월 장릉. 다른 왕릉에 비해 작고 소박하다.
단종이 묻혀 있는 영월 장릉. 다른 왕릉에 비해 작고 소박하다.
▽단종의 삶과 흔적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된 곳입니다. 섬이 아닌데도 섬처럼 고립된 절해고도(絶海孤島) 지형이에요. 이곳엔 수령 600년 된 30m 높이의 소나무가 있습니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과 슬픈 소리(音)를 지켜보았다고(觀) 해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부르지요. 그해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은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고 10월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장릉은 단종의 무덤입니다. 세상을 떠나고 간신히 암매장된 뒤 중종 때인 1517년에 이르러서야 묘를 제대로 꾸밀 수 있었습니다. 이어 숙종 때인 1698년 왕으로 복권되어 그 후부터 장릉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장릉은 원래 왕릉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다른 왕릉에 비해 작고 소박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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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시 영월엔 놀랍게도 박물관이 25곳이나 있습니다. 동강사진박물관, 영월아프리카미술박물관, 호안다구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 인도미술박물관, 세계민속악기박물관, 라디오스타박물관 등. 가장 최근에 생긴 라디오스타박물관은 인기 영화 ‘라디오 스타’의 촬영무대였던 방송국을 박물관으로 꾸민 곳이에요. 매력 만점이니 꼭 둘러봐야 합니다. 아이들보다 부모들이 더 좋아할 곳입니다.

▽꼬리에 꼬리 물기

장릉은 조선 왕릉의 하나입니다.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지요. 영월 장릉 답사를 계기로 조선 왕릉에 대해 궁금증과 관심을 가져 보면 좋을 겁니다. 조선시대 임금은 모두 27명이었는데 왕릉은 왜 42기인지, 광해군과 연산군의 무덤은 포함된 것인지 아닌지, 능(왕릉)과 묘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등 말이지요.

강진 다산초당과 다산동암 건물에 걸려 있는 현판들. 위로부터 추사 김정희 글씨 ‘다산초당’과 ‘보정산방’, 다산 정약용 글씨 ‘다산동암’.
강진 다산초당과 다산동암 건물에 걸려 있는 현판들. 위로부터 추사 김정희 글씨 ‘다산초당’과 ‘보정산방’, 다산 정약용 글씨 ‘다산동암’.
○ 강진과 정약용

유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더 있습니다. 바로 다산 정약용(1762∼1836)입니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답니다.

▽정약용은 왜 유배를 갔을까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유배를 보낸 명분은 국가가 금지했던 천주교(서학)를 믿었다는 것인데, 실은 정치적으로 탄압이었습니다.

▽정약용의 삶과 흔적들

강진에 도착한 정약용은 우선 주막집의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4년 동안 지냈어요. 현재 복원된 사의재는 한쪽을 주막처럼 꾸며 놓았습니다.

정약용은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부터 1818년까지 다산초당에서 지냈습니다. 이곳에서 분노와 외로움을 삭이면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해 ‘목민심서’와 같은 명저 500여 권을 저술했답니다. 이곳엔 연못정원을 비롯해 차를 끓였던 부뚜막, 바위에 새긴 글자도 있어요. 풍경이 좋은 데다 나무가 많아 늘 서늘하지요. 여름에 가도 시원합니다.

다산초당의 건물들엔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어느 것이 정약용의 글씨이고, 어느 것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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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에서 산을 넘어가면 백련사가 나옵니다. 아름다운 절이지요. 정약용은 백련사를 오가며 차를 즐겨 마셨습니다. 소설가 한승원은 이 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칭송합니다.

강진은 고려시대 청자를 제작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강진은 곳곳이 청자 도요지입니다. 강진청자박물관도 있지요. 모란꽃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도 매력적입니다.

▽꼬리에 꼬리 물기

정약용을 흠모했던 추사 김정희 역시 1840년 제주 서귀포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는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유배의 시련을 딛고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국보 180호)를 그렸습니다. 제주에 가면 추사 유배지를 꼭 들러야 합니다. 추사 유배길(3개 코스)도 조성해 놓았답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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