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에 의해 유배된 러시아 사할린 섬 한인들에게 광복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무책임한 일본, 무력한 조국, 옛 소련의 차별. 남겨진 한인 일부가 북한행을 택하면서 이산(離散)의 아픔도 겪어야 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재외 한인 역사에서 사할린만큼 특별한 궤적을 지닌 곳도 드물다.
그런 이곳에 1인 공관(사할린출장소)이 배치돼 있다. 한인 규모 2만5000명(재외 국민 약 200명), 1990년 시작된 한인 1세 영주 귀국, 묘지 조사, 유골 봉환, 각종 영사·교류 사업을 감당하기엔 버겁다. 가해자인 일본이 약 80명의 사할린 재외 국민을 위해 12명 규모의 총영사관을 설치한 것에 비하면 “역사에 무책임하다”는 탄식까지 나올 정도다. 동아일보가 사할린 한인의 70년 자취를 밟았다. 》 “한국 영주 귀국 허용한다지만 자식 두고 오라는데 어떻게 가”
‘임자 없이 버림 받은 사람들.’
사할린 한인 1세들의 ‘어제’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들은 일제의 국적으로 동토의 땅 사할린에 왔다. 패망한 일제는 이들을 버렸다. 광복된 고국은 데려갈 힘이 없었다. 상당수가 오랫동안 무국적자로 방치됐다.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생면부지 북한으로 가기도 했다. 분단은 사할린에서도 이산(離散)을 낳았다.
“내가 여기 안 올 긴데. (태평양) 전쟁으로 바빠진 일본 놈들이 마을마다 강제 징용을 나왔지.” 김윤덕 씨(92). 고향은 경북 경산. 1943년 아버지 대신 장남인 그가 사할린행 배를 탔다. 동짓달 열이레(음력 11월 17일)에 도착한 사할린의 추위는 살을 에었다.
“2년만 고생하면 돌아갈 기다.” 2년에 70년을 더했다. 사할린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차로 2시간. 일제강점기 때 가와카미 탄광으로 불렸던 시네고르스크에 그는 아직 살고 있다.
“탄을 지고 엎드려 팔꿈치로 갱도를 올라야 했지.” 지금도 팔꿈치가 새카맣다. 1981년까지 탄광에서 일했다. 언제 고향에 갈지 몰라 1990년까지 무국적자로 살았다. 직업도 아이들 교육도 불이익을 받았다. 거주 지역 밖으로도 못 나갔다.
1950, 60년대. 북한이 이들의 귀환을 부추겼다. “조선(북한)에 가면 대학 교육도 공짜로 시킬 수 있시다!” “(무국적자 대상) 임시공민증의 일본 이름을 없애고 북조선(북한) 공민증을 받아 자기 이름을 가지라!”
경남 밀양이 고향인 이쾌임 씨(80·여)의 부모는 1964년 함경북도 김책으로 갔다. “그때 북조선에 많이 갔지…. 통일 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거야.”
시집을 간 그만 남겨 둔 채 친정 식구가 다 갔다. 그 뒤로 딱 네 번 북한을 찾아 가족을 봤다. “영양 부족으로 고생하는 걸 보며 마음이 아팠어…. 통일 됐으면 고향에 가실 수 있었을 텐데, 돌아가셨지….”
이들처럼 영주 귀국을 하지 않은 한인 1세가 수백 명이다. 정태식(83) 황순녀 씨(81) 부부는 “내 조국은 한국이지만 자식 손자 두고는 못 간다”고 했다. 정부가 1세들만 영주 귀국을 허용한 탓이다. 한인 1세들은 “자식 없이는 그저 죽으러 가는 것”이라며 “지금 방식은 또 다른 이산을 만든다”라며 고개를 떨궜다.
‘국적 없는 부모’ 설움이 나의 힘 “고국서 우리말방송국 도와주길”
‘이국에 태(胎)를 묻고 부모의 고향을 그리워하네.’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성공을 향해 악착같이 달려왔다. 부모가 국적이 없어서 받는 진학과 취업의 불이익도 이들을 막지는 못했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희생했다. 이젠 부모가 목 놓아 부르던 고향을 바라보며 분단을 뛰어넘는 꿈을 꾼다.
김영순 유즈노사할린스크 경제법률정보대 부총장(56)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잠시 북한을 찾은 아버지가 평양에 살던 어머니를 만나 사할린으로 돌아왔다. 김 부총장의 시부모는 경북 출신이다.
그의 부모와 시부모는 ‘동상간(의형제)’이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동향끼리 마음 맞는 이들끼리 가깝게 지내며 외로움을 달랬다. 이를 “동상간 놓다”라고 한다. 어릴 적 지금의 시어머니를 고모라 불렀다. 남편은 그의 아버지를 삼촌이라 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 양가의 결사반대를 극복한 남남북녀의 결혼. 그는 “남북은 분단됐지만 사할린에서 가족의 통일을 이뤘다”고 표현한다.
사할린주한인협회 임용군 회장(61), 사할린주한인여성회 권행자 회장(67)은 호텔업 건설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사할린 한인들의 위상을 높인 대표적 한인 2세다.
장태호 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대 교수(65)는 1983년 모스크바국립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사할린으로 날아왔다. 눈물을 쏟으며 부모에게 절했다. 그는 시를 쓴다. 2005년 영주 귀국한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지하철에서 눈물을 흘리며 쓴 ‘멀고도 가까운 한국’은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페스티벌 그랑프리를 받았다.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두 개의 체제, 두 개의 슬픔’도 펴낸다.
사할린의 유명 동포 시인 허남영 씨(60)는 김소월 윤동주의 시를 올해 러시아어로 번역해 출판한다. 고향을 그리다 화병으로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시를 쓰게 했다.
김춘자 씨(64)가 국장으로 있는 사할린우리말방송국은 사할린국영TV 채널을 통해 한국어로 전통·대중문화를 알려 오다 러시아 정부 지원이 중단된 뒤 재정 위기를 맞았다. 1960년대 초 옛 소련이 한글을 가르치던 조선학교를 폐지해 한국어를 못 하는 2세도 많다. 김 국장은 호소한다. “사할린 한인의 민족애를 키워 온 우리말방송을 한국이 외면할 겁니까?” “전통예술-한식 러시아인도 찬사… 자녀에게 한국 이름 지어줬어요”
‘부끄러움은 잊는다. 되찾는 한민족 자부심.’
사할린 한인 3세는 부모(2세)와는 달리 한국의 높아진 국력을 보며 어른이 됐다. 버림받고 차별받던 무국적자의 기억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1세는 고향에 뼈를 묻고 싶어 했다. 3세는 세계 속의 한인으로 도약하려 한다.
6월 30일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국제교류재단, 농어촌희망재단 주최로 ‘광복 70주년 농어촌 청소년 희망 나눔 사할린 연주회’가 열렸다. 한인 가야금 연주자들은 금난새 씨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멋진 앙상블로 애국가, 아리랑, 그리운 금강산을 들려줬다.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 한민족과 신 율리야 과장(40)의 제자들이었다. 신 과장은 1995년 사할린에서 북한의 개량 가야금(21현) 연주를 보는 순간 매력에 빠져들었다. 2005년 한국 국악단이 사할린에서 공연한 전통 가야금(12현)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의 학생들은 지난해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 문화 프로그램에서 사할린을 대표해 사물놀이와 전통 무용을 공연했다.
“북한 가야금은 기술이 중요하고, 한국 가야금은 한민족의 느낌(혼)이 중요해요.” 어린 시절, 한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북한 개량 가야금이 인생을 바꿨고 한국 전통 가야금이 한민족의 혼을 깨닫게 했다. 그는 남북 가야금을 모두 연주한다.
임 엘비라 씨(41)는 사할린국립종합대 한국어과 학과장이다. 그가 1992년 1회로 입학할 때만 해도 한국을 몰랐다.
“어렸을 때 3세들은 까만 머리에다 김치를 먹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죠.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한국의 경제 성장 덕분이다. 한류의 영향도 크다. 한국어과 학생의 85%가 비(非)한인이다. 지난달 1일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열린 ‘사할린 한국 요리 콘테스트’ 참가자 18명 중 12명이 러시아인일 정도다. 한국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3세들은 자녀들에게 사할린 한인 역사와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가르친다. 3세들의 이름은 대부분 러시아식이지만 자녀들에겐 한국 이름을 지어 준다.
임 학과장이 묻는다. “1세 영주 귀국이 올해로 끝난다지요? 귀국이 끝나면 사할린 한인의 역사도 끝인가요? 사할린에 남은 더 많은 한인이 새로운 미래를 일구는 게 안 보이시나요?”
:: 사할린 한인 ::
주로 1939∼1945년 강제 징용 등으로 러시아 사할린 섬 탄광에서 노역한 한인과 그 후손을 가리킨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4000여 명의 한인 1세가 영주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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