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광주백범기념관 9월 문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1일 03시 00분


12억 들여 학동 역사공원에 개관… 청소년 역사교육 공간으로 활용

10일 광주 동구 학동 역사공원(백화마을 터)에 들어선 광주백범기념관. 전시실과 세미나실을 갖춘 기념관은 다음 달 개관한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0일 광주 동구 학동 역사공원(백화마을 터)에 들어선 광주백범기념관. 전시실과 세미나실을 갖춘 기념관은 다음 달 개관한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광복 이듬해인 1946년 9월 24일 광주 대성초등학교 운동장.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환영 기념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구름 같은 시민들이 몰렸다. 강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자 당시 초대 광주시장이던 서민호 선생(1903∼1974)이 환영사를 낭독했다. 서 선생은 환영사 말미에 “광복 이후 만주, 일본 등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거처할 곳이 없는 동포들이 현재 광주천에서 움막을 짓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연단에 선 백범 선생은 청중들에게 험한 중국 벌판에서 펼쳤던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렸다. 강연 말미에 선생은 수행원에게 제주도와 부산, 경남 진해, 전남 여수·순천 등지서 강연(애국계몽운동)을 한 후 받은 특산품 등을 연단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광주시민의 환영에 감사드린다. 맘 편히 먹고 입고 잘 때가 없는 귀국 동포들이 거처를 마련하는 데 써 달라”고 당부했다. 백범 선생은 22세 때인 1898년 일본군 중위를 죽이고 도피하던 중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광주 증심사 등에 머물렀다.

광주시청 경제과 공무원으로 일했던 향토사학자 박선홍 씨(89)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 씨는 “백범 선생의 강연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고생하는 재외동포들을 보고 특산품, 후원금 등을 가져갈 수 없다고 했던 말씀이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서민호 선생은 백범 선생에게 받은 특산품 등을 옛 전남도청 주변에 있던 당시 광주시청 건물에 보관하도록 했다. 그는 강연회가 열린 지 1주일 후 지역 유지 30명을 시청 회의실로 초청했다. 유지들에게 명주천 등을 건네며 “백범 선생 선물이니 하나씩 가져가고 그 대신 귀국 동포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광주 동구 학동 광주천 인근에 4평 남짓한 집 100채가 들어섰다. 이곳은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라’는 의미로 백화마을로 불렸다. 백화마을은 1992년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판잣집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165가구의 백화아파트가 들어섰다.

애달픈 귀국 동포들의 정착촌에 백범 선생의 뜻을 기리고 아름다운 사연을 간직한 광주백범기념관이 다음 달 개관한다. 백화마을이 있었던 광주 동구 학동 역사공원(2454m²)에 들어서는 488m² 규모의 기념관은 지상 3층 건물로, 전시실(2층) 세미나실(3층)을 갖췄다. 기념관 건립 예산 12억4200만 원 중 3억7900만 원은 독지가가 후원했다. 건립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액을 내놓은 독지가는 (사)백범문화재단에 신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범문화재단은 1998년 광주비엔날레에 백범의 나의 소원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린 이후 기업가 종교인 학자 등이 결성했다. 이후 지역과 연고가 깊은 백범 선생을 기리는 각종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안종일 백범문화재단 이사장(83·전 광주시 교육감)은 “광주백범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17년 만에 그 빛을 보게 됐다”며 “각계의 후원으로 건립된 기념관을 광주시에 기부해 역사교육공간으로 가꾸겠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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