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J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나 원숭이 같아.”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J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다. 지금 막 사진관에서 면접용 증명사진을 찍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머리도 매만지고, 사진을 찍기 위해 구매한 정장도 입고, 간밤에 연습했던 미소도 열심히 지었단다. 사진을 찍어준 사람도, 머리를 매만져준 사람도 모두 편안하게 대해줘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었는데 막상 인쇄된 사진을 보니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다고 했다. 이제야 정말 물가에 내던져진, 전쟁에 뛰어든 취업준비생이 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그리고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는지 본인을 ‘원숭이’에 빗댄 것이다. 어떤 대답으로 J의 마음을 다독여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듣기만 했다.
J는 이제 막 취업 준비를 시작한 초보 취업준비생이다. 취업에 대한 J의 불안한 모습은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던 몇 달 전부터 수면 위로 드러났다. 체감하지 못했던 취업 걱정이 같은 학년 아무개의 인턴 합격 소식을 들으며 시작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먼저 졸업한 아무개는 알아주는 대기업에 취업했다느니 하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입소문이 J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그때부터 J는 남들보다 덜 준비되었다고 느낀 자신을 두고 자책했다. 나름대로 학교생활 열심히 했고, 학점도 나쁘지 않게 받았으며, 간간이 자격증도 따놨는데 친구들보다 턱없이 부족한 준비였다.
졸업 후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한 J의 일상은 대개 이렇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서 오전에는 무조건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러 나간다. 조금이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공부할 책을 챙겨 도서관에 간다. 아주 간혹 동네 카페에서 공부할 때도 있지만, 커피 값도 만만치 않은 지출로 느껴져 꾹 참았다가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만 간다. 친구들과의 모임은 글쎄. 오고 가는 이야기들에 마음이 흔들릴까 무서워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에 얼굴만 비치는 정도다. 어디를 가든 자신의 위치를 설명해야 할 때 ‘취업준비생’이라고 말하면 상대방의 표정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한다. 매우 고단해 보인다는 듯한 표정. 굳이 그런 표정이 보고 싶지 않을 땐 대학생이라 에둘러 말하고 만다.
취업 전쟁 속 기나긴 싸움의 끝은 입사일까. 신문을 펼쳐 봐도, 뉴스 채널을 돌려봐도, 인터넷 화면을 클릭해도 취업 전쟁, 청년 실업의 머리기사는 어디서나 눈에 띈다. 요점은 비슷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정책을 바꾸자, 청년들 힘내시라. 그렇지만 이 모든 기사의 당사자인 청년의 마음은 결국엔 ‘나를 바꾸자’로 귀결되는 듯하다. 좀 더 나은 학점, 좀 더 나은 경력, 좀 더 따야 할 자격증, 좀 더 나은 인상. 이것이 현실이다. 오늘도 J는 밥 먹듯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고 있을 것이다. 수십 번 고쳐 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로 한 번에 합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낙방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빈칸에 적을 수 있는 자신만의 경력도 같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J에게 전화가 온다. 간혹 귀찮을 때도 있다. 내 코가 석 자라고 힘든 이야기를 듣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러나 J의 연락을 매몰차게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연락의 횟수가 불안함의 정도를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만큼 힘 빠지는 말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힘을 냈으면, 이런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으면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진심이다. 현실은 죽을 쑨 것처럼 질척거린다. 그러나 당장 솟아날 수 있는 구멍은 많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성장통이 이렇게까지 씁쓸할 줄 몰랐지만, 다음 단계의 진입로가 조금 좁을 뿐 길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외롭게 소리 없이 전쟁 중인 청년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위로를 건넨다. 이미 겪었지만, 언제 다시 겪을지 모를 전쟁의 승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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