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얼굴만 기억에서 도려낸 듯했다. 범행의 시작과 끝을 감당해야 했던 70대 할머니는 유독 ‘그놈’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손자들 앞에서 성폭행당한 충격은 할머니에게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을 줬고 충격으로 범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몇 해 전 이 사건을 맡은 경찰수사연수원 이태현 교수(과학수사학과)는 할머니에게 검은 의자에 앉도록 권했다. 푹신한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눕게 했다. 인간이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붉은색 조명을 적절한 밝기로 조절했다. 벽에 있는 한 점을 계속 응시하다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최면수사에 나선 이 교수의 말에 따라 할머니는 ‘좋아하는 길’과 ‘좋아하는 꽃향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통의 시간을 애써 지워버리려는 피해자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조치다. 자신에게 위안과 힘이 되는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고통을 이겨내는 바로 그 순간에 그놈의 얼굴이 떠올랐고 할머니는 조금씩 인상착의를 말했다. 아무 증거가 없던 사건의 범인 몽타주가 작성된 순간이다. 1시간 동안의 최면수사를 마친 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백합꽃 향기가 아직도 내 코에 생생하게 나네요. 감사합니다.”
법최면은 충격으로 당시 기억을 정확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피해자나 목격자를 대상으로 한다. 목격자가 최면이 걸리면 도둑이 탔던 오토바이 번호판을 떠올리기도 한다. 현재 최면수사를 할 수 있는 경찰은 전국적으로 22명 정도다.
최면이라는 말 때문에 최면수사를 미신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면수사는 엄연히 인정받고 있는 과학수사기법 가운데 하나다. 눈으로 전체 사물을 보면 양옆 방해하는 것들이 모두 보이지만 최면은 눈에 원통을 갖다 붙인 것처럼 그 부분만 볼 수 있도록 기억을 돕는다. 뇌파를 측정하는 두 가지 측정 장치만 머리에 붙이면 진짜로 최면에 걸렸는지, 그런 척하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최면이 피해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과학수사기법이라면 ‘폴리그래프 검사’는 피의자들과의 두뇌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명 ‘거짓말 탐지기’라는 이름으로 일반인 사이에 알려진 폴리그래프 검사는 수사의 방향을 짚는 데 도움을 준다. 경찰은 연간 8600건 정도의 폴리그래프 검사를 진행한다.
2011년 ‘내연녀 살인사건’의 경우 피의자는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폐쇄회로(CC)TV에는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는 시골 마을에 여성의 차량이 들어가는 모습만 찍혀 있었다. 나오는 모습은 전혀 없어 내연남 집 인근에서 사라진 것으로 경찰은 심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집 주변 야산은 수색하기엔 너무 넓었다.
내연남의 눈앞에 집 주변 사진 6장을 하나씩 들이밀었다. 그중 한 사진에서 내연남의 맥박과 신체지수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결국 경찰은 굴착기로 사진 속 지점을 파헤쳤다. 굴착기 기사였던 피의자가 묻은 여성과 차량이 드러났다.
폴리그래프 검사가 있다는 사실이 범인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아무리 속이려 해도 훔친 물건 사진이나 범행도구 사진 앞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져 죄를 털어놓는 범인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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