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선 별장 내부는 호텔 객실처럼 깨끗했다. 누군가 머문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막 청소를 끝낸 듯 세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별장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연락이 끊긴 20대 여성 A 씨는 내부에 없었다.
출동한 경찰 과학수사요원은 거실, 침실, 화장실에 로봇청소기처럼 생긴 이동식 3차원(3D) 촬영기를 설치했다. 분석요원은 CSI 차량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로 촬영기가 전송한 화면을 관찰했다. 360도 회전하는 촬영기는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광원으로 별장 내부 상황을 보여 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섬유, 모발, 지문, 족적 등을 확인하고 모양과 크기를 측정했다. 그러나 거실 바닥, 장식대, 소파 등에서 범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겹쳐진 지문 한 개만 테이블 모서리에 남아 있었다.
요원은 겹쳐진 지문을 따로 분리했다. 지문에 레이저를 방출한 다음 반사돼 돌아오는 시간을 이용해 1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두께도 구분하는 레이저 단차 측정 기법을 사용했다. 분리된 지문 하나는 사라진 A 씨, 다른 것은 그의 남자 친구 것이었다.
남자 친구는 전날 별장에 간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요원은 체취 증거 분석용 전자코로 포집한 현장 냄새를 증거로 내밀었다. 전자코는 현장에서 수집한 냄새 중에서 남자 친구의 체취와 일치하는 냄새의 화학 성분을 찾아냈다. 같은 화장품, 향수를 써도 유전적 특징에 따라 체취는 지문처럼 모두 다르고 세제 냄새로 덮을 수도 없다.
남자 친구는 별장 인근 호수에 시신을 버렸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별장 상공에 드론(무인촬영기)을 띄워 호수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이 이야기는 과학적 근거 없이 그냥 써 본 드라마 줄거리가 아니다. 창설 70주년을 맞은 경찰이 실제 연구개발 중인 기술을 토대로 구성해 본 가상 상황이다.
증거 수사의 영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 확대되고 있다. 발자국에서 키와 몸무게를 유추하고 현장에서 나온 DNA로 얼굴형과 피부색을 확인해 몽타주를 그린다. 범죄 빅데이터를 분석해 범죄 발생 위험이 큰 장소와 시간대를 예측하는 영화 같은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경찰은 기대하고 있다.
최용석 경찰청 과학수사계장은 “불과 20년 전까지는 지문과 족적에 몰두했지만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증거를 찾는 시대가 열렸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7월 27일부터 ‘증거는 말한다’ 시리즈를 통해 갈수록 고도화되고 지능화되는 범죄에 맞서는 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현장의 과학수사요원들은 정약용의 형법서 ‘흠흠신서’의 글귀를 품고 다녔다. “털끝만 한 일까지 세밀히 분석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살려야 할 사람을 죽게도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을 오히려 살리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털끝보다 작은 증거를 찾겠다는 집념에 첨단 과학수사 기술이 더해진다면 그동안 가려내지 못했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이제 불가능의 영역이 아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과학수사는 경찰의 과학화를 가늠하는 척도”라며 “국민이 물리적 증거와 과학적 추론을 통해 입증한 수사 결과를 신뢰하기 때문에 과학수사 발전은 경찰의 시대적 소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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