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법원 “치료비 전액 지급” 확정
1957년 지원 시작… 외국인은 차별
‘年 300만원’ 상한선 없어져 국내 피해자들 치료비 부담 덜게 돼
일본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본 피해자가 한국에서 치료를 받더라도 일본 정부가 의료비 전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피해자를 일본인과 외국인으로 구별하지 않고 의료비 전액 지원을 인정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첫 판결로, 일본이 1957년 피폭자 지원을 시작한 이후 58년 만에 외국인 차별이 해소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최고재판소 제3부(재판장 오카베 기요코)는 8일 한국에 살고 있는 히로시마(廣島) 원폭 피해자 이홍현 씨(69)와 피폭자 유족 2명이 오사카 부(府)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의료비 전액을 지급하라는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조선소에서 일하던 강제징용 노동자였으며 이 씨는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어머니 배 속에서 피폭을 당했다. 가족은 그해 12월 한국에 돌아와 경북 김천에 정착했고 이듬해 1월 이 씨가 태어났다.
이 씨는 어릴 때부터 코피를 자주 흘렸고 고혈압과 만성심부전증 등에 시달렸다. 이 씨의 부모도 기관지염 등을 앓다가 어머니는 1993년, 아버지는 1996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 씨는 2008년 일본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지원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지출한 의료비 2700만 원을 보전해 달라는 소송을 일본 법원에 냈다. 일본의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피폭자원호법)’은 피해자의 의료비를 국가 부담으로 규정했지만, 해외 거주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일본은 해외 거주 피해자가 해외에서 진료를 받을 경우 일본과 의료 체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연간 30만 엔(약 300만 원, 2014년 기준)까지만 지원했다.
외국에 거주하는 피폭자는 올 3월 말 기준으로 4280명이며 한국 거주자는 8월 말 기준으로 2500여 명이다. 한국 원폭 피해자는 1945년 당시 4만 명으로 추정됐지만 고령과 치료비 부족에 따른 사망으로 급격히 줄었다. 원고 이 씨는 이날 자료를 내고 “판결이 나올 때까지 의료비 지급을 미룬 일본 정부와 오사카 부는 앞으로 생명의 중요함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날 판결 직후 “원고 이외의 해외 피폭자에 대해서도 의료비 지급을 전면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판결은 히로시마나 후쿠오카 등에서 진행 중인 다른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원폭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市場淳子) 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피폭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의료비 지원인데 여기까지 40년이 걸렸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성낙구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은 “그동안 몸이 아파도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이 협회 회원 등 120여 명은 이날 오후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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