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가득히 숨을 마시고 내뱉었다. 쉬이∼ 하는 기계 소리 없이 산소가 그대로 코를 거쳐 폐로, 그리고 온몸으로 쫙 퍼지는 게 느껴졌다. 믿기지 않았다. 눈을 감고 코끝과 콧구멍을 다시 만졌다. 나는 지난 4년여간 산소호흡기와 이를 연결해 준 콧줄 없이는 숨을 쉬지 못하는 중증폐손상 환자였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우아, 엄마가 아빠가 됐어요.”
네 살 난 딸 정아가 콧줄을 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만 바로 까르르 웃었다. 정아에게 엄마는 콧줄이 있는 사람, 아빠는 콧줄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정아는 콧줄을 달지 않은 엄마를 본 적이 없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누군가의 소중한 폐를 이식받아 오롯이 내 몸으로 숨쉴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산모. 2011년 이후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를 칭하던 말이다. 신지숙(37)이라는 내 이름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다. 하지만 막상 무슨 일이 내게 벌어졌는지 아이를 낳을 때도,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도 잘 몰랐다.
그 일이 있기 전 나는 씩씩하고 건강했다. 남편과 함께 줄넘기와 달리기를 했는데, 솔직히 내가 더 잘했다.
습기가 부족하면 눈이 건조했던 나는 가습기를 자주 틀었다. “인체에 안전한 성분이라 아이한테도 쓸 수 있다”는 바로 그 가습기 살균제를 처음 본 것은 2009년 9월. 이후로 가습기를 틀 때마다 청소를 겸하여서 수시로 살균제를 함께 사용했다. 이 사소한 선택이 나와 우리 가족을 이렇게 큰 고통으로 밀어 넣으리라고 그때 어찌 알 수 있었을까.
○ 기침과 구토, 숨 차는 증상…임신 때문이라 믿어
2011년 4월 임신 28주가 됐을 때 기침과 가벼운 구토 증세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숨이 많이 찼다. 길거리에서 전화가 오면 먼저 짐을 내려놓고 통화를 해야 했다. 아이가 있는 친구들은 “임신해서 배가 부르면 원래 숨이 찬다”고 했다. 동네 산부인과 의사도 비슷하게 말했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기침이 심해졌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졌다. 혹시나 배 속의 아이한테 좋지 않은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해 5월 말 다시 찾은 산부인과 의사는 내 상태를 보고 급하게 검사를 하더니만 “빨리 대학병원에 가보세요”라고 했다.
“폐가 딱딱하게 굳는 폐 섬유화가 상당히 진행됐습니다. 매우 심각합니다. 치료를 받아야 하니 내일 당장 아이를 낳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옮겨간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를 낳으라고?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황은 긴박했다. 다음 날 바로 제왕절개로 정아를 낳았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출산 뒤 쭉 중환자실에 살았다. 아이에게 젖을 못 물려 젖몸살까지 찾아왔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나는 그저 소용돌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얼마 후인 6월 9일 나는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겨졌다.
솔직히 당시엔 내가 왜 아픈지도 몰랐다. 그냥 폐질환이 생겼다고만 생각했다. 서울아산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아, 요즘 뉴스에 나오는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 피해자가 바로 나였구나’라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살기 위한 치료법은 폐 이식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산소호흡장치에 의존해 살아야 했다. 병원을 옮긴 후 바로 폐 이식 대기자로 등록했고 다행히 얼마 뒤 이식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완강히 거부했다. 혼자 살겠다고 가족 모두를 수천만 원 빚더미에 앉게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폐 이식의 기회를 놓치자 가족들은 안타까워했지만 오히려 난 홀가분했다.
○ 콧줄과 함께한 4년여…안아주는 딸 덕에 버텨
그래서일까. 상태가 좋아졌다.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겼고 얼마 되지 않아 퇴원했다. 물론 산소호흡기도 함께였다. 코에 긴 줄을 달았다. 한순간도 이 장치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태어난 지 100여 일 만에 정아를 만났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던 내 딸. 처음엔 너무나도 작은 생명체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내 안에 품고 말랑말랑한 감촉을 느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뻐서 그랬던 것인데 쌕쌕거리는 나를 보더니 가족은 내 걱정을 하며 아이를 ‘뺏어가’ 버렸다. 그 마음은 알지만, 야속함이 밀려왔다.
집에서도 정아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남편 역시 출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주중엔 아이가 아주버니 댁에 가 있었다가 주말에만 우리 집으로 왔다. 정아한테도, 아주버니 내외께도 미안했다. 아이가 돌이 됐을 때 정아를 직접 키우겠다고 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장애인 대상 도우미를 신청하면 된다”며 걱정하는 가족을 설득했다. 무엇보다 태어난 뒤 1년 동안 옆에 제대로 있어주지 못했던 정아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은 날씬해, 아기곰은 너무 귀여워. 으쓱으쓱 잘한다.”
모든 엄마들이 수백 번을 불렀을 ‘곰 세 마리’ 노래. 나는 ‘곰 세 마리가’까지만 불러도 숨이 찼다. 한참 쉬다가 ‘한집에 있어’를 불렀고, 또 한참 쉬다가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을 불러야 했다. 하지만 정아는 노래가 쭉 이어지지 않자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균등하게 한 소절씩 노래를 불러 녹음했고, 그렇게 완성된 노래를 정아에게 들려줬다. 처음엔 관심을 갖더니 금세 또 뽀로통해졌다. 아이는 내가 옆에서 직접 불러주길 바랐던 것이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처음엔 한 소절만 불러도 숨이 찼지만, 다음엔 두 소절까지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 연습했더니 노래 한 곡을 쉬지 않고 부를 수 있게 됐다. 물론 숨이 차 헉헉거렸지만. 정아는 이런 내 노래에도 즐거워했다.
아마 이때였던 거 같다. ‘폐 이식 수술을 받고 싶다. 그래서 정아 옆에서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건강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
하지만 호흡 곤란은 수시로 찾아왔다. 1년에 3, 4개월은 병원 신세를 졌다. 그래도 정아를 돌볼 때면 힘이 생겼다. 그럼에도 늘 미안했다. 함께 놀이터에서 놀아주지도 못했고 세 끼 모두 만들어 먹이지도 못했다. 툭하면 우는 나약한 엄마를, 정아는 늘 꼬옥 안아줬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몸은 갈수록 약해졌다. 2014년 6월부터는 폐 기능이 더욱 악화돼 밤에 잘 때 마스크 형태의 가정용 인공호흡기를 착용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정부가 그해 4월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게 치료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 아파도 행복…딸과 함께 슈퍼에 가고 싶어
8월 3일 호흡 곤란이 계속돼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 여느 때처럼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저녁 갑작스럽게 폐 기증자가 나타났고 그 다음 날 폐 이식 수술을 받았다.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고 했다. 놀랍도록 빠르게 진행됐다.
요즘은 아파도 기쁘다. 주치의로 나를 계속 돌봐준 서울아산병원 홍상범 교수(호흡기내과)와 폐 이식 수술을 해준 김동관 교수(흉부외과)에게 감사했다. 나한테 폐를 주고 세상을 떠난 그 누군가도 정말 고마웠다. 나도 장기기증을 할 수 있을 만큼 빨리 건강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행운아다. 많은 사람의 도움과 사랑으로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 같은 피해자가 다신 나타나선 안 된다.
제일 먼저 정아 손을 잡고 슈퍼에 가고 싶다.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물건을 여느 엄마처럼 실랑이를 하다가 사주고 싶다. 가족과 소풍도 가고 싶다. 아, 아직 내 몸 상태가 가을 소풍은 어려우려나. 그럼 또 어떤가. 건강해진 후 내년 봄에 소풍을 가면 되지. 행복하다. 그런데 왜 또 눈물이 날까. ※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가습기 살균제(세정제)로 인해 폐 손상 증후군(기도 손상, 호흡 곤란 및 기침, 급속한 폐손상(섬유화) 등의 증상)을 일으켜 영·유아와 아동, 임신부, 노인 등이 사망한 사건으로 2011년 4월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총 221명. 이 중 92명이 사망했다. 피해자는 정부 조사 등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입은 가능성이 높다고 판정된 사람들이다. 2014년 4월부터 환경부에서 의료비를 100% 지원받고 있다. 올해 5월 12일 문을 연 서울아산병원 환경보건센터가 이들의 건강 모니터링과 정신 상담 및 치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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