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경기 안성시 탈북자 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에서 흥겨운 남한 유행가가 울려 퍼졌다.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자 60여 명이 참가한 ‘하나원 방문의 날’ 행사에서 탈북 예술단이 교육생 170명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졸업생이나 교육생이나, 추석을 앞두고 실향의 아픔을 서로 달래자는 행사였다. 이날 하나원은 1999년 개원 이래 두 번째로 외부인들에게 내부를 공개했다.
하지만 교육생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선배’ 탈북자들로 구성된 예술단 공연에 함께 웃으며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도 공연 도중 눈물을 훔치거나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보였다.
“한국에 와서 첫 추석을 이곳에서 맞으니 마음이 착잡하단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맞는 추석인데,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맘이 아픕니다. 북한 가족들도 저를 생각하면서 아파할 겝니다.”
고향이 함북 청진이라고 밝힌 여성 탈북자 김지원(가명) 씨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다른 교육생들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격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들의 꿈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고 싶다”였다. 하지만 이들의 꿈이 이뤄질 날은 점점 더 먼 미래로 잡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북한에서 사람 빼오기가 너무 힘들어요. 이젠 한국까지 오는 데 한국 돈 1200만 원을 부른단 말입니다. 그 돈 언제 다 모으겠어요. 게다가 요즘엔 국경에다 철조망 다 둘러친단 말입니다. 중국에 나왔다 잡히면 가족이 한국에 있는 경우엔 무조건 정치범수용소행이지 뭡니까.”
함북 무산이 고향인 20대 여성 최수민(가명) 씨의 말이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고향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데려오고 싶어 했다. “8년 전 제가 탈북할 때는 북한 국경경비대에 중국돈 100위안만 주면 안전하게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전한 루트가 없어요. 부모 형제를 영영 다시 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이 됩니다.”
특히 2015년은 탈북자들에게 감회가 깊은 해다. 1995년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면서 탈북자가 급증했다.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넘어가는 인원이 한 해 수만 명에 육박하던 대규모 탈북 사태였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란 말이 본격 사용된 시기도 바로 1995년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것이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2010년 이후 탈북자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추석을 앞둔 탈북자들의 팍팍한 현실과 최근 탈북 추세를 심층 취재했다.
▼ “달님 달님, 北에 두고온 어머니 소식 좀 전해주오” ▼
그리움에 사무친 탈북자들, 일부는 “추석 쇠는 법도 잊어”
올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추석을 맞는 탈북자 김지선(가명·29·여) 씨와 박선아(가명·28·여) 씨는 추석 명절이 반갑지 않다. 22일 기자와 만난 김 씨는 “추석 연휴가 표시된 달력을 볼 때마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요즘 들어 잠을 설친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 씨와 박 씨는 먼 친척 사이. 지난해 여름 비슷한 시기에 탈북한 이들은 중국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들이 탈북을 결심한 계기는 가족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었다. 장사를 하던 김 씨의 어머니는 보위부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은 뒤 풀려난 지 3개월 만에 숨졌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2년 동안 남몰래 탈북을 준비하던 김 씨는 지난해 7월 당시 네 살배기 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박 씨도 아버지가 사업 문제로 보위부에 끌려갔다가 숨진 직후 탈북을 준비하다가 김 씨와 비슷한 시기에 두만강을 건넜다. 추석을 앞둔 이들은 한결같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았다. 김 씨는 2년 전 북한에서 보낸 마지막 추석 때 모친 산소 앞에 새 비석을 세운 일을 떠올렸다. 그는 목멘 소리로 “어머니 산소에 갈 수 없어 너무 안타깝다”며 말을 이어갔다.
박 씨도 “병든 어머니를 북한에 남겨둔 게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형제들에게는 탈북 계획을 미리 귀띔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끝까지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행여 걱정을 끼쳐드려 병세가 악화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 씨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엄마 목소리를 꼭 듣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탈북자들은 요즘 가족을 그리워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1999년 입국한 장인숙 씨(75·여)는 명절만 되면 북에서 사별한 남편과 탈북 과정에서 붙잡힌 둘째 아들 생각이 난다고 했다. 1978년 세상을 떠난 장 씨 남편의 산소는 평양 인근 공동묘지에 있다. 장 씨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망가져 있을 남편의 산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아들들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간직했다가 통일 뒤 남편 묘에 같이 묻어 달라고 신산당부를 해놓았다”고 말했다. 1999년 함께 탈북하다가 보위부에 붙잡힌 둘째 아들은 아직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원에서 만난 한 탈북 여성은 “하나원은 그래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덜한데 사회에 나가서 혼자 쓸쓸히 추석을 맞으면 서러워 눈물이 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중국 국경을 넘은 뒤 남한으로 입국하기까지 북한과 중국 당국의 눈길을 피해 장기간 접경지대에서 지낸 일부 탈북자는 추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지난주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 여성 4명은 “우린 추석 쇠는 법을 잊어버렸다”며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추석에도 특별히 마음이 아프지도 않고 그저 무덤덤하다”고 했다. 장기간 이국에서 숨어 지낸 결과 추석에 대한 기억이나 공동체 의식도 거의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도 점점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날이 갈수록 탈북자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격감하는 탈북자, 브로커도 일감 떨어져
통일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는 614명이다. 이는 지난해 전체 1397명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 규모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계속 늘었다. 그야말로 대규모 탈북 사태였다. 2001년 1043명이 입국해 연간 입국 탈북자가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섰다. 2006년 입국한 탈북자는 2028명이었고, 2009년엔 2914명에 이르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만간 연간 입국 탈북자가 5000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2009년 정점을 찍고 점차 하향 추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급작스레 줄었다.
탈북자 규모가 갑자기 줄자 이들의 정착교육을 맡은 하나원도 놀라는 기색이다. 9월 현재 안성시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는 여성 탈북자는 17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원 화천군에 있는 제2하나원에서 생활하는 남성 탈북자까지 다 포함해도 200명 남짓이다. 하나원 교육 일정을 감안하면 최근 3개월 동안 한국에 입국한 규모도 200명 수준으로 짐작할 수 있다. 9월에 하나원에 들어간 탈북자는 30명 정도다.
하나원 측은 몇 년 전 500명 이상 수용이 가능하도록 시설을 확장했다. 하지만 막상 확장하고 나니 탈북자가 크게 줄었다. 화천의 제2하나원은 더 난감한 표정이다. 통일부는 안성 하나원의 수용능력 500명이 부족하다고 보고 2009년 화천에다 새로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제2하나원 건물 건설에 들어가 2012년 12월 완공했다. 제2하나원은 7만7400m² 땅에 예산 349억 원을 투입했다. 그렇데 막상 시설 운영에 들어간 시점에서 이용률이 예상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현재 제2하나원에서 교육받는 남성 탈북자는 30∼40명 수준. 제2하나원은 요즘 사회에 정착한 일부 전문직 탈북자를 대상으로 직업교육 등 맞춤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시설을 착공했던 2009년 당시 탈북자 규모가 이렇게 급속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요즘은 탈북자를 도와주며 수수료를 챙기는 브로커 중에서도 “일감이 없다”며 다른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중국의 한 브로커는 “6년 전만 해도 탈북자가 워낙 많아 한꺼번에 8명 정도씩 데리고 3국 국경까지 가 돈을 벌 수 있었다”며 “최근 중국에서 1, 2명씩 움직이다 보니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탈북자 입국 증가세가 꺾인 2010년부터 북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의문을 알아보기 위해 탈북자와 구출 활동가 50여 명을 만나거나 전화로 접촉했다.
휴전선처럼 변해 가는 북-중 국경
흔적선, 대못 판, 무인카메라, 철조망, 비상벨…. 올해 탈북해 한국에 입국한 김창민(가명·35) 씨는 이런 말을 나열하며 북-중 국경을 넘던 아찔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우선 철조망을 넘은 뒤 모래를 말끔하게 깔아놓은 ‘흔적선’을 건너뛰어야 한다. 땅에 묻어놓은 대못 판을 밟을 위험도 피해야 한다”며 말을 꺼냈다.
북한 철조망을 넘어도 안심할 수 없다. 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해도 무인카메라가 달린 철책과 탈북자 신고 체계가 또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요즘에는 중국 철책을 넘어 국경의 중국 가옥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기도 두렵다”며 “집집마다 중국 공안이나 변방 부대와 연결된 비상벨이 있는데, 주인이 몰래 누르면 체포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다중 경계는 모두 김정은 집권 이후 생겨난 것이다. 요즘도 북한과 중국은 국경의 감시망을 겹겹이 쳐놓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올해 3월 김정은이 국경경비대에 “국경연선의 ‘3대 장벽’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최근 보도했다. 3대 장벽은 ‘물리장벽’ ‘감시장벽’ ‘전파장벽’을 뜻한다.
물리장벽은 북-중 경계의 압록강과 두만강에 설치된 물리적 장애물이다. 전기철조망과 함정, 대못을 박은 판자 등이 포함된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6월 초부터 러시아에서 철조망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높이 1.6m의 러시아산 철조망 위에 10cm 간격의 전기선 4개가 설치됐다고 한다. 물론 전력난 때문에 아직 전기는 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국경 철조망은 2006년부터 설치가 시작됐지만 그동안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러시아 철조망이 들어온 뒤 탈북이 가장 빈발한 압록강 상류 양강도 지역은 현재 철조망 공사가 끝났고, 지금은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 공사가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역시 대규모 탈북 사태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2009년경부터 국경 주요 탈북 및 밀수 루트를 철조망으로 차단하는 작업에 들어가 지금 대부분 마무리됐다.
북한은 국경 전역에 철조망과 함께 너비 4m, 깊이 3m의 함정을 파놓는 계획도 세워 뒀다. 하지만 함정 몇 곳에서 물이 자꾸 스며 나와 이 계획이 흐지부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목함지뢰 수만 개를 설치한다는 소문이 국경 지역에 퍼지고 있다.
감시장벽은 국경에 설치된 최신 감시 장비들이다. 복수의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탈북을 막기 위해 군사분계선에 설치했던 야간 감시 장비까지 뜯어 북-중 국경에 설치했다. 탈북이 주로 밤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과거 압록강과 두만강 옆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강에 나가 빨래도 하고 물도 길어 먹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미리 허가를 받은 뒤 정해진 통로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통행을 허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안전보위부, 보안서, 국경경비대, 지방 적위대, 인민반 등 각 기관과 조직에서 차출된 인원이 4중, 5중으로 국경을 순찰한다. 이들은 의심이 가는 사람을 단속해 탈북자인지 조사하고 있다.
“몇 년 전 수입해 온 독일산 전파탐지기가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 통화를 하다 붙잡혀 처형된 사람이 많다. 통화 위치가 잡히면 10분도 지나지 않아 수색대가 현장을 둘러싸기 때문에 무서워서 전화를 못하겠다.”
지난달 통화한 북한 주민의 말이다.
최근 북한은 외부 세계와의 휴대전화 통화나 대북 라디오 방송 수신을 막기 위해 전파장벽 구축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전파 방해 장비도 중국이나 독일에서 들여와 국경과 인접한 도시와 마을에선 중국과 통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통화가 어려워지면 탈북도 쉽지 않아진다. 이제는 북-중 국경을 넘기가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진 것이다. “북조선 최대 적은 남조선 아닌 탈북자”
지난해 탈북한 최준호(가명·36) 씨는 “김정은 체제 들어 달라진 것이라면 탈북하다 체포되면 무조건 민족 배반자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체포되면 무조건 한국으로의 도주를 기도한 것으로 여긴다. 본인이 정치범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정치범관리소로 끌려간다. 뇌물을 많이 주어 판결을 잘 받아내도 최소 3년은 교화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북한의 살벌한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만난 탈북자들도 탈북자 격감의 주요 요인으로, 과거에 비해 탈북자 처벌이 훨씬 가혹해진 점을 많이 꼽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탈북자들에게 내려지던 처벌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대규모 아사 사태가 시작되자 최소 수십만 명의 탈북자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된 사람도 수만 명에 이른다. 당시 북한은 북송된 탈북자를 조사한 뒤 정상을 참작하며 처벌 수위를 조절했다. 특히 경제난으로 인한 단순 탈북자에 대해선 처벌이 비교적 가벼웠다. 대다수 탈북자는 3∼6개월 노동교화형(강제노동) 판결을 받았다.
▼ 데려오고 싶어도… 강 건너는 비용 500배나 뛰어 ▼
하지만 지금은 처벌 수위가 크게 올라갔다. 요즘 체포되는 일반 탈북자는 대개 정치범수용소에, 국경에서 떠도는 꽃제비의 경우도 교화소에 들어간다. 정치범수용소와 교화소엔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치범수용소의 경우 과거 1970, 80년대 수용됐던 정치범들이 거의 다 숨졌다. 최 씨는 “수용소 안에서 정치범이 줄다 보니 수용소 내 탄광이나 농장 등이 돌아갈 수 없다. 과거 정치범의 자리를 지금은 탈북을 기도했다가 체포된 사람들이 메우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북한에선 “탈북하다가 잡히면 인생이 완전히 끝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목숨을 건다는 각오를 해야 탈북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2008년 11월경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은 김정일에게 “탈북자를 없애겠다”는 계획을 첫 약속으로 내걸었다. 그 후 김정은은 “우리 체제의 최대의 적은 미제나 남조선이 아니라 탈북자”라고 선언하고 “도주하는 탈북자를 즉각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 이후 북-중 국경에서 탈북자가 사살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지금도 김정은은 주요 탈북 사건에 대해 직접 보고를 받고 대책을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9일에도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2세대 8명이 집단 탈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바로 다음 날 김정은이 “당장 무산 지역을 철조망으로 완전히 봉쇄하라”는 불호령을 내렸다고 북한 전문 인터넷매체 ‘데일리NK’가 보도했다. 이 지시에 국경경비대가 하계훈련도 급히 단축하고 철조망 공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천정부지로 뛰는 탈북 비용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하태민(가명) 씨는 최근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탈북 브로커에게 한국 돈 1000만 원을 건넸지만, 얼마 전 어머니가 탈북 도중 체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모은 돈인데, 돈이 모자라 어머니 목숨을 빼앗겼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탈북자에 대한 처벌 수위와 함께 탈북 비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한 탈북 브로커는 “북-중 국경을 넘는 데만 700만 원 정도 써야 한다. 들키면 경비대원 자신들도 총살되기 때문에 웬만한 금액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경비대가 돈을 받으면 자기만 아는 통로로 강을 건너게 해주는데, 우리가 중국 쪽에서 대기하다가 즉시 차에 태우고 번개같이 도시로 달아난다. 그런데 변수가 너무 많아 우리도 옛날보다 훨씬 더 몸을 사린다”고 말했다.
2000년대 후반만 해도 탈북자들이 국경 경비대원에게 중국 돈 100위안(약 2만 원) 정도만 주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비용이 불과 6∼7년 사이 1000만 원 이상으로 올랐다. 500배 넘게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도 탈북자들은 “정확한 탈북 비용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은 성공을 장담하며 북한에서 사람을 빼오겠다는 브로커가 거의 없다고 했다.
가장 큰 불안 요인은 국경 경비대원에게 많은 돈을 주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처음엔 국경경비대와 단속 초소를 몇 배로 늘리고 탈북자와 탈북 방조자를 엄벌에 처하는 등 고전적인 방지책에 매달렸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뇌물이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정은은 2010년경 “경비대원이 탈북자를 신고하면 받은 뇌물을 절대 빼앗지 않고 오히려 노동당 입당과 승진, 대학 추천을 해준다”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조치는 근래의 북한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조치가 내려진 뒤부터 경비대원이 돈을 받고 나서 탈북자를 신고하는 현상이 빈발해졌다. 탈북자와 국경경비대원 사이에 불신이 팽배한 결과 돈 보따리를 싸들고 가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뇌물을 주고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니 국경경비대의 ‘소득’도 떨어졌다. 탈북자들은 “국경경비대도도 결국 손가락만 빨게 됐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라고 입을 모았다.
탈북자가 국경을 넘어 중국 도시로 가도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다. 중국 당국자들은 최근 기차표를 살 때도 신분증을 검색하고 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승용차나 버스를 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한다. 중국 당국은 최근 이슬람 위구르족이 중동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하기 위해 중국을 탈출해 태국 등 동남아로 가는 일이 빈발하자 남쪽 국경 통제를 강화했다. 위구르족의 탈출 루트는 탈북자들이 동남아로 이동하는 길과 겹친다. 지난해 3, 4월에도 중국은 남부 지역에서 350여 명의 밀입국 브로커를 체포했다. 이 중엔 탈북자들을 동남아 지역으로 넘겨주던 브로커가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 같은 사건도 탈북비용 상승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됐다.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대다수 북한 주민은 탈북의 꿈을 점차 접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정말 목숨을 내걸 만큼 위급한 상황에 처한 주민이나 남한에 사는 가족이 브로커 비용을 대줄 수 있을 때만 탈북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내년에도 탈북자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생계형’ 탈북에서 ‘이민형’으로 바뀔 조짐도 나타나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것은 포기했어요. 돈을 북에 보내 장사를 하도록 하는 게 훨씬 낫지요. 서로 얼굴을 못 보고 사는 건 안타깝지만, 그 편이 최선인 것 같아요.”
1년에 몇 차례씩 북에 있는 오빠에게 돈을 보낸다는 한 탈북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이어 “오빠가 와봐야 낯선 땅에서 외롭게 힘든 직업을 전전할 게 뻔한데, 차라리 내가 돈을 보내면 고향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사업가로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매년 좋아지고 김정은 체제가 주민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대폭 완화한 것도 탈북자가 감소하는 이유로 꼽힌다. 최근 ‘돈주’라고 불리는 신흥 부유층이 소규모 기업 경영에 뛰어들면서 노동력만 팔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주민층이 두꺼워지고 있다. 죽을 각오로 탈북을 결심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탈북 비용을 댈 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올해 탈북한 이종만(가명) 씨는 “1만 달러가 넘는 브로커 비용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왜 탈북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북한에선 1만 달러 정도의 자본이 있으면 여러 명을 고용해 사장이 될 수 있는데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월 30달러만 주면 인력은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도 북한의 가족에게 많은 돈을 들여 성공 확률이 낮은 탈북길에 오르게 하기보단 돈을 보내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남한에 먼저 온 가족이 보내준 돈을 받고 중국에서 체류하지 않고 곧바로 남한으로 오는 ‘직행’ 탈북자도 거의 늘지 않고 있다. 하나원 관계자는 “하나원 입소자 중 직행 탈북자의 비율은 오래전부터 20∼30%로 고정돼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자식의 미래를 위해 탈북했다는 주민도 가끔 눈에 띈다. 지난 주말 하나원에서 만난 한 여성의 탈북 이유는 중학생 딸 때문이었다.
“이 애가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북에선 김일성대나 외국어대를 가고 싶어도 못 가지 않습니까. 또 배워도 쓸 데가 별로 없고요. 북에서 우리도 잘살았지만 고민 끝에 올봄 딸의 꿈을 위해 탈북했습니다.”
이는 과거 남한이 가난했던 시절 미국 등 선진국으로 자녀를 위해 가족 전체가 이민을 떠나던 상황과 흡사하기도 하다. 앞으로 탈북 양상이 ‘생계형 탈북’에서 가족의 미래를 위한 ‘이민형 탈북’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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