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크리스 제인 씨(27)는 지난해 한국에 입국해 경기도의 한 영어전문학원에서 2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영어만 할 수 있으면 취업이 된다’는 광고를 보고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원래 꿈꿨던 일은 아니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청년 실업이 심각해지면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제인 씨 같은 사람이 늘고 있다. 재정위기를 겪은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경제 상황이 그나마 나은 선진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일자리 찾아 3만 리
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층(15∼24세) 실업률이 52.4%까지 치솟은 그리스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난 청년은 30만 명에 이른다. 다른 남유럽 국가인 이탈리아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07년 20.4%이던 청년 실업률이 지난해 42.7%로 급등하면서 독일 프랑스 등 경제 사정이 그나마 괜찮은 이웃나라로 이동하는 이탈리아 청년이 크게 늘고 있다.
이들 나라의 청년 실업 문제가 급격히 심화된 가장 큰 이유는 경기 불황이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가 몇 년째 이어지면서 매년 노동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는 대졸 청년들이 취업할 일자리는 태부족이다. 디미트리스 소티로플로스 아테네대 정치공공행정학과 교수는 “해외로 떠나거나, 실직 상태로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전공과 상관없는 값싼 일용직에 근무하는 세 가지 선택지만 그리스 청년들에게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중장년층이 은퇴를 미루거나, 이미 은퇴한 이들마저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면서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그리스 아테네에 살고 있는 주부 지아니 바실리키 씨(46)는 최근 지인을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남편의 벌이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지자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다.
각국 정부가 연금 개혁을 통해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춰 은퇴 이후 연금을 받을 때까지 공백이 길어진 점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연금 수령액이 삭감되고 자식들마저 좀처럼 취업하지 못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중장년층이 노동시장에 다시 뛰어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OECD의 ‘2015년 2분기(4∼6월) 회원국 고용률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55∼64세 남녀 장년층 고용률은 65.5%로 OECD 평균(58%)을 크게 웃돌았다. 최근의 전체 취업자 수 증가도 청년층이 아닌 50대 이상이 주도하는 모습이다. ○ 노동 개혁 후 정규직 더 증가
가뜩이나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중장년층과 세대 간 경쟁을 벌이는 청년층의 박탈감은 크다. 마시오 바사로티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 노동교육국장은 “은퇴하지 않고 일자리 시장에 눌러 앉는 숙련 노동자들이 젊은이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영국 런던의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리마 팀 씨(21)는 고용주가 원하는 시간에만 일하는 ‘제로시간(zero-hours) 근로자’다. 하루하루의 근무 여부와 근무 시간을 고용주가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공일(空日)이 많은 일자리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고용주가 “오후 4시에 출근해 2시간만 일하라”라고 연락하면 팀 씨는 그제야 출근을 준비한다. 그는 “고용주가 일하기 하루 전날 밤이나 당일 아침에 근무 여부를 알려 주기 일쑤”라고 말했다.
청년층과 중장년층이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노동 개혁에 나섰다. 일부 국가에서는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이탈리아는 마리오 몬티가 총리를 맡던 2011년에 ‘노동법 18조’를 수정해 해고 요건을 완화했다. 기업이 노동자를 입맛대로 해고할 것이라는 노동계의 우려와 달리 노동시장이 활력을 되찾으면서 올 상반기(1∼6월)에만 새로 정규직을 얻은 사람이 95만2000명이나 된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근로자도 33만1000명이다. 그 결과 전체 고용에서 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33.6%에서 올해 40.8%로 크게 늘었다.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년 연장,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해소 등의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모두 불만이 크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층은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좌절하면서 경제 활력이 더 떨어지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고통을 분담하려는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4년간 일-대학교육 병행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취업 ▼
독일의 청년실업 해법은
일마즈 귀어 씨(21)와 닐스 바커 씨(20)는 세계 5위 자동차 부품 회사인 독일 콘티넨탈사의 ‘일-학습 병행제’ 교육생이다. 고교 졸업 후 2013년 말 입사한 두 사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절반은 회사에서 드릴 톱 망치 등을 사용한 공작 기술을 배우고 나머지 절반은 대학에서 이론을 공부한다.
두 사람은 지난해 말 이 회사에서 중요한 시험을 봤다. 그들이 받아든 시험지는 네모난 철판 한 장. 이 철판으로 ‘올드 타이머’라는 1950년대식 클래식 카 모형을 만들어 1년 동안 기술을 제대로 배웠다는 점을 입증해야 했다. 한 달 동안 철판을 구부리고, 뚫고, 자르고, 용접해 마침내 정교한 모형을 완성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청년 실업의 해법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학습 병행제는 이런 독일식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모델로 했다. 총 4년인 독일의 일-학습 병행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처음 2년 6개월 동안은 주로 직업교육을 받는다. 일주일에 3일은 회사에서 직업교육을 받고, 2일은 대학에 가는 식이다. 나머지 1년 6개월 동안은 대학교육에 더 집중해 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프로그램을 마칠 때면 학사학위와 기술 분야 자격증을 동시에 딴다.
바커 씨는 “졸업 후 석사 과정에 들어갈지, 콘티넨탈사에 취업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어떤 선택을 해도 만족스러울 것”이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이 독일식 일-학습 병행제를 정착시키려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야한다고 진단했다. 브리지트 셸레 독일 상공회의소 직업교육국장은 “기업이 직업교육에 필요한 이론과 과정을 정부에 건의한 뒤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법제화하는 상향식 구조로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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