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실험실에서 한 번이라도 미생물을 다뤄본 연구자라면 이번 건국대 사태가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다루는 연구자는 늘 감염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연세대 석사 졸업생)
동아일보는 실험실 안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단국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가나다순) 등 12개 대학의 석·박사과정 연구원과 졸업생, 인턴(학부생) 등 총 20명과 인터뷰했다.
○ 실험실 안전불감증 심각
취재 결과 실험 시 기본적인 안전 수칙조차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단국대 석사 졸업생은 “바이러스 실험은 바이러스 배양실에 격리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원칙인데 연구실에서 그냥 진행했다”고 털어놨다.
심지어 병원성 세균을 다룰 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연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한 졸업생은 “병원성 세균을 사용할 때에는 완전히 격리된 공간에서 모든 실험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며 “세균이나 세균의 포자가 물이나 공기를 통해 전파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말했다.
실험 안전에 대한 연구원들의 낮은 인식도 지적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졸업생은 “쥐에 주입해야 할 바이러스가 들어 있는 주사기를 자칫 잘못해 사람에게 찌를 경우 면역반응이 나타나면서 염증이 생기고 심하면 쇼크까지 올 수 있다”며 “그런데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고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밝혔다.
건국대의 한 대학원생은 “농대의 경우 최근 생명과학 실험이 커리큘럼에 많이 포함되면서 미생물을 다루는 빈도가 높아졌는데 실험 안전 인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폐렴 사태가 벌어진 건국대 동물생명과학대도 최근 미생물 실험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연구실 안전교육 이수 방식 바뀌어야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연구실 안전환경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이 교육은 6개월마다 1번씩 연간 2차례 실시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교육 중 한 가지를 택할 수 있다.
연구원들은 안전환경교육이 형식적이라고 지적했다. 단국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한 졸업생은 “마치 민방위훈련을 받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다들 소극적으로 참여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으로 교육을 이수할 경우 이런 폐해는 더 심각했다. 숙명여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한 졸업생은 “온라인 강의여서 집중해서 듣기가 쉽지 않았다”고 전했고, 성균관대 박사 졸업생은 “마우스로 클릭하면서 빨리 끝낸 경우도 많았다”고 밝혔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실험실 안전교육이 엄격하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한 학생은 “실험실 안전교육을 이수하느라 한 달째 실험은 시작도 못하고 있다”며 “방사능 교육, 동물실험 교육, 바이러스 교육 등 종류도 많을 뿐 아니라 모두 직접 강의를 들어야 하고 시험도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 실험실과 정책 간 괴리 커
실험실 현장 여건과 동떨어진 정부나 대학의 안전 지침도 도마에 올랐다. 건국대 한 대학원생은 “연구비가 부족해서 비싼 실험용 라텍스 장갑 대신 일회용 비닐장갑을 쓰는 실험실도 본 적 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한 대학원생은 “바이러스를 에어로졸 형태로 실험할 때 착용하는 보호 장비가 있는데 너무 고가여서 한정된 연구비로는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실험실도 있다”며 “이런 경우에는 결국 마스크와 방호복만 착용하고 실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화여대 대학원생은 “연구 공간과 실험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는 지침이 있지만 정작 대학은 그만큼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지 않고 기기실도 좁아 장비 사이 거리를 규정에 맞춰 널찍하게 놓을 수 없다”며 “실제 여건은 안 되는데 규정만 지키라며 벌점을 주니 억울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 연구실 안전 전담인력 美대학 50여명 - 韓 1, 2명 ▼
국내대학 예산 0.3%만 안전에 투입
“미국에서 방사성 동위원소를 다루는 실험을 했어요. 당시 임신 중이었음에도 실험실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안전 기준이 있었거든요.”
문애리 덕성여대 약대 교수는 1980년대 후반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임신과 출산을 겪었다. 문 교수는 “당시에는 철저한 안전 기준 때문에 빨리 실험을 진행할 수 없어 불편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장기적으로는 안전 기준을 지키는 게 정답”이라고 말했다.
2012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발간한 ‘연구실 안전관리 정책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상위 30개 연구중심대학의 안전관리 전담 인력은 평균 52명인 반면 국내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1, 2명의 인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명여대 석사과정 재학 당시 연구실 안전책임자였던 한 졸업생은 “교내 안전관리 시스템 등을 통해 기본적인 관리는 시행했지만 안전관리 담당자들만 대상으로 전체 교육을 받은 경험은 없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 연구실 안전 관련 예산은 연평균 1억 원 안팎으로 기관 총예산의 0.3%에 불과하다.
국내에서는 2006년 ‘연구실 안전 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연안법)’을 제정한 뒤 내용을 계속 다듬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일례로 2013년 개정된 제6차 연안법 25조는 ‘안전교육을 실시하지 않을 경우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고만 두루뭉술하게 돼 있다. 몇 명이 안전교육을 받아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서울대 환경안전원의 한 담당관은 “과태료 부과 기준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며 “대학에는 실험실 연구원만 수천 명이 있는 만큼 안전교육 이수자 수에 대한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연안법 13조는 연구비를 책정할 때 반드시 안전 관련 예산을 반영하도록 규정한다. 대학은 인건비의 1∼2%를 안전 관련 예산으로 책정해야 한다. 이 담당관은 “대부분의 대학이 실험시설 구축이나 물품 구입 시 이미 안전관리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건비를 기준으로 안전 예산을 추가로 투자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선미 동아사이언스 기자 vamie@donga.com 권예슬 동아사이언스 기자 ys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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