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나를 부끄럽게 만든 어르신들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

지금 사는 동네는 아주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언덕과 좁은 길로 되어 있다. 언덕의 경사가 워낙 대단해서 초보 운전자가 운전을 하면 위험할 수 있는 곳이고 올라가는 차와 내려가는 차가 마주치면 조금씩 양보해야 지나갈 수 있는 곳이다.

이런 동네에서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면 골목마다 자동차들이 얽혀 아수라장이 되기 쉽다. 안 그래도 좁은 길에 거대한 공사 차량과 자주 다니는 마을버스, 택배 차량만 섞여도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전과 연결되는 부분이니 이런 상황이 생기면 운전자들은 쉽게 날카로워진다. 언덕마다 사각지대를 볼 수 있는 도로 반사경이 있지만, 누군가 직접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면 수월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새로운 공사가 시작되면 언덕의 모퉁이마다 노란 조끼를 입으신 몇 분의 어르신이 야광봉을 흔들고 계셨다. 밑에서 공사차량이 올라오면 위쪽의 언덕을 담당하는 어르신들이 내려가는 차량을 정차시켰고, 공사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차들은 차례대로 내려갔다. 서로 먼저 가겠다고 얼굴을 붉히는 일도, 사각지대의 아찔한 사고도 없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분들은 누구실까, 궁금했다. 그중 연세가 많으신 몇 분을 보면 공사현장과 관계된 분들은 아닌 것 같았다. 봉사단체에 소속된 분들일까. 아니면 동네주민으로서 도와주시는 걸까.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자발적인 모습으로 참여한다. 예전에 살던 동네의 옆집 아저씨도 그랬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옆 동네의 눈까지 다 치울 것처럼 빗자루를 들고 돌아다니셨다. 본인 집 앞의 눈조차 쓸지 않는 사람들의 눈을 치우시거나 누구나 사용하는 외부 계단, 위험한 내리막길 같은 곳을 쓸어내셨다. 매년 겨울마다 아저씨가 눈을 치우셨으니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면 눈을 치워 주는 아저씨 같은 공식이 머릿속에 박힌 것이다.

눈을 치워 주셨던 아저씨나 야광봉을 들고 교통정리를 해 주시는 어르신들은 누가 시키지 않은 봉사를 하시면서 마음속으로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물론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비슷하다. 본인의 손해와 이익은 잘 계산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야만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는 꼭 해야만 했던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학창시절에는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양로원을 방문하고, 길거리의 쓰레기를 주웠다. 봉사 자체의 성취감이나 뿌듯함도 있었겠지만, 시간과 점수를 채워야 하는 압박감이 더 컸다. 이제는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눈을 쓸지 않아도, 동네의 공사 차량을 정리하지 않아도, 꼭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몸은 편했을지언정 마음은 부끄러웠다. 눈을 치우던 아저씨를 당연히 눈을 치우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야광봉을 들고 계신 어르신들을 언젠가 그런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왠지 이분들을 또 뵐 것 같다. 쌓인 눈을 쓰는 빗자루 소리와 함께. 그때는 같이 있을 생각이다. 내 집 앞에 쌓인 눈은 당연히 치워야 하는 것이고, 조금 더 쓸지 뭐. 이런 생각이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무서운 얼음으로 돌변하기 전에 다 쓸어버려야지. 이런 생각이다.

봉사. 누군가를 위해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귓속의 딱지가 되어 사라져버린 이야기다. 나의 안위를 챙기기도 바쁜 시절이지만, 나보다 어렵고 난처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를 위해 내민 봉사의 손길을 당연히 내밀어야 할 손짓으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