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과 훈련, 백서라는 용어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세월호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같은 재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각각의 의미와 상관관계는 모르는 것 같다.
재해 때에는 여러 조직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세월호 대책에는 해경, 해양수산부, 소방, 보건복지부,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조직이 관계했다. 그런데 모 부처의 매뉴얼에는 큰 사고가 나면 다른 이슈를 제기해 여론을 덮어버리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런 매뉴얼은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매뉴얼은 상호 간 약속이다. 상대의 매뉴얼을 모르면 상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사전 약속도 없이 무술영화를 촬영한다고 하자. 손발이 안 맞고 부상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훈련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매년 훈련을 해왔는데도 숭례문이 불에 타버렸다. 의미를 모르는 채 흉내를 냈기 때문이다. 기왓장을 벗길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훈련 매뉴얼을 작성했다. 훈련을 위한 훈련을 한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큰 사고가 나면 수많은 조직이 백서를 쓰고 공개한다. 국내에서는 백서를 쓰지 않거나, 자화자찬하거나, 책자로 배포한다. 몇 년이 지나면 어느 캐비닛 속에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우리 공무원들은 순환 보직으로 일한다.
메르스가 지나가고 있다. 여러 조직들이 백서를 작성 중이거나 발표했다는 보도가 있다. 얼핏 수십 개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손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종이에 인쇄해 배포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공개한다 해도 홈페이지를 찾아가야 내려받을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인터넷에서 제목을 입력하는 것으로, 누구나 손쉽게 백서와 매뉴얼 파일을 내려받고 있다. 그래야 여러 조직이 서로 협조할 수 있다.
재해 대비는 최후의 시험인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비해 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매뉴얼은 예상 문제이다. 훈련은 예상 문제를 외우는 과정이다. 백서는 틀린 이유를 분석하고 예상 문제를 재점검하는 오답노트이다. 매뉴얼과 훈련, 백서를 여러 번 순환시켜야 사회 전체가 발전해 나가게 된다.
우리는 이제 재해 대비에 매뉴얼과 훈련, 백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제대로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 매뉴얼과 백서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인터넷에 공개해야 한다. 법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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