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발음을 따라 하고 꼼꼼하게 필기하는 모습을 담은 수업 영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학생들이 “워 시환 쉐 중원(나는 중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동급생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24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서일국제경영고. 재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시간에 ‘늦깎이 학생’ 20여 명이 설레는 표정으로 등교했다. 3월부터 9개월간 평일 저녁에 중국어와 컴퓨터 수업을 들은 40∼70대 학생을 위한 수료식이 열렸다.
이 학교는 동대문시장에서 가까운 창신동에 자리 잡고 있다. 서일대 중국어과 교수로 강단에 서다 지난해 11월 부임한 이화영 교장(58)이 올해 동대문시장 상인들을 위해 중국어 수업을 마련했다. 이 교장은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주요 고객인 중국인 관광객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게 하겠다며 ‘상용 중국어 회화’ 수업을 기획하고 화, 목요일 저녁마다 직접 강의했다. ‘유커 중국어(遊客漢語)’라는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중국어와 함께 상인들이 꼭 배우고 싶다는 스마트폰, 컴퓨터 활용 수업도 금요일 저녁에 진행했다.
30여 명이 수강한 중국어 수업은 ‘손님맞이 인사’ ‘감사와 사과’ ‘손님 안내’ ‘입어보기’처럼 장사를 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상황에 맞춘 커리큘럼 덕분에 효과가 컸다. 동평화시장에서 33년 동안 의류 도소매를 해온 김수옥 씨(52·여)는 “아직 마음대로 중국어를 하진 못해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를 제법 알아들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중국인 손님이 서툰 한국말로 “안 예쁘다”고 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사자, 예쁘다”고 얘기하는 것을 알아들을 때면 좀 더 적극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업을 녹음해 일할 때나 설거지할 때 틈틈이 복습한 결과다.
가게에 온 중국인 관광객에게 “중국어 좀 알려 달라”고 했다가 옆 가게 물건을 팔아준 적도 있다는 김 씨처럼 학생들은 “중국인 관광객들의 얘기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반갑고 신기하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것 자체가 정말 행복했다는 학생도 있다. 40년 동안 여성 의류 도매업을 해 온 윤병문 씨는 올해 일흔 다섯이다. 중국어와 컴퓨터 수업을 모두 들은 그는 “이제 사람이 된 느낌”이라며 활짝 웃었다. 윤 씨는 “e메일을 쓰고 카카오톡을 하고 인터넷을 뒤적여 보니 경이롭다는 생각뿐”이라며 “내년에는 포토샵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 잘 배워서 꼭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교사보다 학생의 나이가 더 많은 수업. 학생들의 열정 때문에 교장 연수를 받는 기간에도 수업을 거를 수 없었다는 이 교장은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활용하면서 정말 즐거워하고 고맙다고 아낌없이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많았다”고 했다. 서일국제경영고는 다음 달 17일부터 다시 중국어 수업을 시작한다. 수업은 무료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