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명단이 다 노출된 마당에 심사를 강행하겠다는 건 문화재청이 줄대기와 로비를 대놓고 방관하는 것 아닙니까?”(원로 무용가 A 씨)
15년 만에 이뤄지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 선발을 앞두고 심사위원 11명의 명단이 사전 유출됐다는 본보 보도(26일자 A1·27면)와 문화재 지정의 문제점을 진단한 시리즈가 나간 이후 며칠 동안 제보 메일과 전화가 쏟아졌다.
발신자는 이번 인간문화재 심사 신청자 및 이들과 친분 있는 무용계 인사들이었고 무용가의 남편이라며 전화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아무개가 인간문화재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며 각종 비리를 폭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B 씨는 모 국회의원이 주최하는 행사마다 춤을 춰주면서 정치권에 로비를 벌여 왔다” “C는 이미 윗선에서 돌봐주고 있어 사실상 결정된 상태다” “D 정도의 턱도 없는 실력으로는 절대 인간문화재가 돼선 안 된다”….
심사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기자에게도 이렇게 쓸데없는 공을 들이는 마당에 이미 명단이 노출된 심사위원들에게는 오죽할까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무용계에선 심사위원에 대한 어느 무용가의 구체적인 로비설은 물론이고 심사위원이 후보자들에게 먼저 연락해 만나자고 했다는 ‘카더라’식 의혹들이 기정사실처럼 떠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인간문화재가 되더라도 심사의 공정성을 둘러싼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심사위원 명단이 사전에 유출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30일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인정조사(심사)를 강행했다. 3일 승무에 이어 7일 태평무 심사도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소 잃고 외양간마저 고치지 않겠다’는 것일까.
애초에 이번에 과열 양상이 벌어진 데는 문화재청이 ‘뒷말 많은’ 인간문화재 선정을 최대한 미루고 방치해 온 탓이 크다. 각 춤 분야별로 인간문화재가 1명씩 있다는 이유만으로 짧게는 15년, 길게는 27년간 인간문화재 추가 지정을 하지 않아 적체 현상을 초래했고 인간문화재였던 정재만, 이매방 선생이 1년 사이에 잇따라 별세하면서 부랴부랴 서두른 것.
문화재청이 밝힌 강행 이유도 어이없다. 이미 심사 장소를 대관한 데다 지원자들의 연말 공연이 많아 심사 일정을 조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이 걱정해야 할 건 심사 장소 대관 문제나 지원자의 일정 조율 과정에서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시간이 걸려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심사 잣대를 만들고,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시대 변화에 맞게 개선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인간문화재 심사가 문화재청엔 ‘행정 업무의 하나’일지 몰라도 한평생 춤만 춰온 무용가들에겐 십수 년 만에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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