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특별한 내일도, 특별한 내년도 내게 달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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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초등학교 때, 한 반에 다섯 명의 유진이가 있었던 적이 있다. 선유진, 김유진, 박유진, 장유진, 그리고 나, 임유진.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유진이라는 이름이 딸 이름으로 유행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이건 뭐, 흔해도 너무 흔하잖아!’ 중학 시절에는 전국 남학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가요계의 요정 S.E.S가 등장했는데, 이 중 가장 예쁜 멤버의 이름이 하필이면 ‘유진’인 바람에 나는 사람들만 만나면 “그 유진은 그렇게 예쁜데 너는 왜…”라는 이야기를 질리게 들어야 했다(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정말 많지만 그 얘기를 하자면 지면 전체를 도배해야 할 판이니 그냥 넘어가겠다). 심지어 지금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 딸의 이름도 유진. 고등학생 때까지도 내 이름을 마뜩잖게 여긴 나는 내 이름이 너무 흔하다며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종종 불만을 토로했고, 이에 아버지는 고민 끝에 내가 고를 수 있는 후보 두 가지를 내놓으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삼월’과 ‘구월’.

“3월은 만물이 피어나고 약동하는 계절이고, 9월은 수확과 풍요의 계절 아니냐. 아빠는 네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시며 지어주신 이름이다. 아무리 뜻이 좋기로서니, 임삼월과 임구월이라니….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다섯이 아니고 오십 명이라 하더라도 그냥 내 이름 ‘유진’에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언제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밤으로의 긴 여로’로 유명한 유진 오닐이라는 작가를 알고 나서부터는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별명이 아닌 실제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유진 오닐을 알고 난 후, ‘어쩐지 지적이고 문학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여기저기 내 이름을 쓰고 다니기까지 했다. 별것 아니지만, 이게 내가 내 이름의 안티에서 팬이 된 사연이다. 나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천양지차다. 내가 그렇게 보고자 하니, 내 이름과 나 자신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 자신의 느낌과 기운을 정하는 건 사실 이름도, 내게 운명론적으로 결정된 다른 요소들도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내가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 바뀐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게 바뀌는 셈이다.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운을 한번 바꿔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우리는 종종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외모를 바꾸기도 한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변화의 계기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다르게 볼 기회, 멈춰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어떤 일을 멈출 수 있는 기회, 새로워질 기회, 나아질 기회.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걸 바꿔놓을 어떤 계기 말이다. 사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분으로, 하루로, 달로, 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우리에게 어떤 ‘계기’로서 매듭과 시작이 필요한 때문일지 모른다. 언제고 결심을 할 수 있고, 변화를 하자면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영 어려워서 우리는 부러 어떤 매듭을 설정한다. 이는 ‘어제까지는 그랬지만, 오늘부터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이 가능한 배경이기도 하고, 망친 어제와 지난날을 회복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우리에겐 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시작되곤 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

지금 새해 결심의 리스트를 주섬주섬 적고 있자니, 나는 사실 언제라도 무언가를 하겠다, 혹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데 굳이 12월과 1월을 기다리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나의 내일은, 나의 내년은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면 달라지고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늦었다”는 개그맨 박명수의 말을 교훈 삼아, 늦기 전에,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물론 유의미하다. 그러나 연말과 연시라는 이 절기상의 특수함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능성과 기회를 보장한다. 11월까지는 망했지만 아직 12월이 있고, 1월부터 망했지만 2월… 아니, 3월까진 아직 새해 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이건 우리끼리의 약속이다. 우리가 나아질 계기는 늘 있다.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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