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전 7시 반 경기 남양주시 한양병원 장례식장. 이틀 전 생을 마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갑순 할머니의 빈소엔 적막이 흘렀다. 곧 발인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유족 5명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직원 2명을 제외하곤 찾는 이가 없었다.
빈소 입구엔 손녀가 눈이 퉁퉁 부은 채 앉아 있었다. 몇 개 안 되는 조의금 봉투를 정리하던 그는 남편과 함께 발인에 쓸 물품을 챙겼다. 빈소 안에는 할머니의 며느리와 손자, 손부가 말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최 할머니는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에 태어났고 15세 때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했다. 광복 후 시집갔지만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인 최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밥상을 뒤엎으며 날마다 구박을 해댔기 때문이다. 결국 할머니는 아들을 뒤로한 채 시가에서 도망쳐야 했다. 생전 할머니는 치매에 걸린 뒤에도 위안소와 시가에서 당했던 고난을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발인 시간이 가까워지자 가족은 빈소 안에 모였다. 며느리와 손자 손녀 부부 등 5명이었다. 아들은 건강이 안 좋아 할머니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리던 며느리는 “어머니, 한 많고 쓸쓸했던 인생 이제는 편히 가시오. 부족했던 자식도 용서하고 좋은 곳에 가시오”라고 흐느끼며 주저앉았다.
손자가 영정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17개 조화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외교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장관 등이 보낸 것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요일에 조문하고 갔다. 하지만 막상 고인이 떠나는 이른 아침 그 곁을 지키는 정부 관계자는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 내내 빈소를 지킨 정대협 직원은 “국회 여성가족위 의원 중 빈소를 찾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이라고 말했다.
최 할머니는 운구차에 실리는 순간에도 쓸쓸해 보였다. 운구를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자와 손부 2명뿐이었다. 관을 옮겨 싣기 위해서는 장정 2명은 더 필요했다. 상조회사 직원들이 힘을 더했다. 할머니는 벽제 승화원으로 옮겨진 뒤 화장됐다. 상조회사 직원은 “할머니 몸이 가냘파서 뼛조각이 얼마 안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유골은 이날 정오 경기 파주시 용미리 수목장에 안장됐다. 앞서 사망한 아들의 유골도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 위안부 생존자는 46명. 살아생전 고통 속에 살았던 할머니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쓸쓸한 모습이다. 유족이 없는 할머니들은 위안부를 지원하는 민간단체에서 상주 노릇도 해야 장례를 겨우 마칠 수 있다. 정부에서는 피해자들에게 각종 생활비를 지원해 주고 있지만 정작 흙으로 돌아가는 날 함께하진 않는다.
정대협 관계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대부분은 가족이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기 때문에 마지막 모습이 더 처량하다”며 “할머니들의 가시는 길에 사회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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