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다른 나라로 여행 가는 게 취재다. 그 덕분에 세상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기회를 누리고 있다. 가는 곳마다 그곳의 문화에서 태어난 독창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중엔 부러운 것이 꽤 많다.
교통수단에 국한해 보면 이렇다. 캐나다는 나무늘보도 혀를 찰 만큼 천천히 차를 몰며 보행자를 배려하는 예의가 있고, 미국은 사막의 교차로에서조차 도로주행시험 볼 때처럼 정확히 차를 멈추고 고개를 양옆으로 돌려 살핀 후 출발하는 정직함이 있다. 유럽에선 느릿느릿 운행하는 노면전차와 휠체어 승객까지 수시로 타고 내리는 시내버스의 여유를 수입하고 싶고, 홍콩과 싱가포르에서는 언제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택시의 편리함이 좋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것은 잘 교육받은 여인처럼 품위 있게 운행하는 일본의 버스다. 승객에 대한 그 세심한 배려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구현한 서비스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이렇듯 칭찬을 아끼지 않는 데는 일본 버스와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울 만큼 낙후한, 아니 무례하기까지 한 우리 버스에 대한 낙담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버스에 매료돼 나는 지난 4년간 규슈 취재 길엔 가급적 버스를 이용했다. 일본의 버스문화, 그건 한마디로 ‘정숙’이다. 운전기사는 정복차림에 모자까지 쓰고 정류장마다 안내방송을 한다. 운행 중엔 교차로이건, 정류장이건 정차선을 절대로 침범하지 않는다. 과속, 신호위반은 물론이고 끼어들기, 추월, 급정거, 급출발도 없다. 관광버스는 수시로 운행일지를 기록한다. 하루 8시간 이상 장거리 운행을 할 땐 교대운전사까지 데리고 탄다. 그래서 일본의 버스는 늘 평화롭다. 그리고 늘 안심감을 준다.
승객에 대한 배려는 더 섬세하다. 정류장의 승객은 우리처럼 이리저리 뛸 필요가 없다. 버스가 한 대씩 차례로 다가와 문을 열어서다. 뒤차는 앞차가 승객을 태우는 동안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다. 차 안의 하차 승객도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문을 연 후에야 일어선다. 후불제인 시내버스에선 요금함 옆 잔돈교환기에서 거스름까지 바꿔야 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놀라운 건 승객이 다 내릴 때까지 승차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 승객이 다 내린 뒤에야 태운다. 그런 뒤에도 기사는 승객이 자리에 모두 앉은 걸 확인하고 출발한다. 버스 안에 방향표시등을 둔 것도 특별하다. 입석 승객에게 몸 쏠림을 예고하는 배려다.
우린 어떤가. 나는 7년째 일산∼광화문 노선의 광역버스로 출퇴근 중이지만 어느 하루도 불편을 거른 적이 없다. 어느 기사는 이어폰으로 20∼30분간 통화를 하며 운전하고, 어떤 이는 혼자 듣는 라디오나 CD를 크게 틀어놓는다. 운전석 뒤엔 운전에 방해가 되니 이 자리에선 전화 통화나 대화를 자제하라는 안내문까지 써 붙여 놓고서. 머뭇대는 앞차에 혼잣말로 욕설을 퍼부으며 난폭하게 추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이건 ‘불편’에 그치니 그런대로 넘긴다. 그게 법규 무시, 난폭주행에 이르면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다. 퇴근길 야간의 수색∼일산(버스전용) 구간. 중앙선 넘어 역주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지신호에도 시속 80km 이상 고속으로 교차로를 폭주하는 난폭운전이 거의 일상사다.
그뿐인가. 내리려면 이런 폭주 중에도 미리 문 앞으로 나가야 한다. 정류장엔 얌전히만 세워줘도 감지덕지.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급히 서는 경우가 태반이다. 운전기사 안중에 승객이 없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지난 7년간 버스가 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아니 그런 시도는 감히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불평을 늘어놓을 자격이 없다. 늘 앉아 가서다. 주변엔 언제나 근 40∼50분을 서서 가는 승객이 있다. 그들에겐 이런 것이 호강에 겨운 불평일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나보다 몇 배나 더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버스, 안타깝지만 이것도 우리 문화다. 동시에 우릴 재는 척도다. 이런 승객 취급과 운전 난폭성, 법규 위반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그 배경은 ‘사람에 대한 예의’의 부재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이렇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