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강수진]봉황당 골목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8일 03시 00분


강수진 문화부장
강수진 문화부장
한때 ‘꿈나무 학번’으로 통하던 88학번이다 보니 요즘 동창 모임마다 화제는 단연 ‘응답하라 1988’(응팔)이다.

88올림픽 호돌이, 별밤, 이미연의 가나초콜릿CF, ‘캡이야’ 같은 유행어, 버스 회수권이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면, “은행 금리가 요즘 쪼까 내려서 15%여” “5000만 원이면 은마아파트도 살 수 있겠네” 같은 대사에선 실소와 함께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응팔’의 인기는 방영 초부터 이전 응답하라 시리즈를 앞질렀다. 시청률은 웬만한 지상파 드라마보다 높고(13.1%·12일 방영분·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체감 시청률은 더 높다.

TV프로그램 온라인 여론 조사업체 굿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방영 중인 27개 드라마 가운데 ‘응팔’이 점유하는 화제성 지수는 39.5%로 압도적 1위다.

이전 응답하라 시리즈가 10대 팬덤 문화(‘응답하라 1997’)와 94학번 대학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응답하라 1994’)을 다뤘다면 응팔은 서울 쌍문동 ‘봉황당 골목’ 안에 사는 다섯 이웃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응팔과 겹쳐지며 떠오르는 건 ‘골목 사진가’로 불린 고(故) 김기찬(1938∼2005)의 흑백 사진들이다. 골목 안 사람들의 삶을 평생의 테마로 삼았던 그는 생전 중림동 행촌동 대현동 도화동 등 서울의 골목들을 누비며 ‘골목안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6권의 사진집을 펴냈다.

골목에 둘러앉아 함께 김칫거리를 다듬는 동네 아낙들, 한여름 물 채운 양동이에서 물장난 치는 아이들, 골목에 반상을 펴놓고 국수를 나눠 먹는 할머니들….

팍팍한 삶이건만 골목 사진은 하나같이 따뜻하다. “삶이 힘겹고 딛는 땅이 비좁고 초라해도 골목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아끼는 훈훈한 인정이 있고, 끈질긴 삶의 집착과 미래를 향한 꿈이 있다”. (‘골목안의 풍경 전집’·눈빛)

사회학자들은 골목길의 소통 기능에도 주목한다. 통행을 위한 길이 아닌 집의 연장이자 삶의 공간 그리고 공동체 문화가 만들어지는 장소로서 골목길이다.

응팔의 봉황당 골목이 딱 그렇다. 아침마다 내 집 네 집 없이 골목길을 쓸고, 아이들은 서로의 집을 내 집처럼 들락거린다. 손 큰 덕선네의 부침개는 집집마다 간식이 된다. 뇌출혈로 쓰러진 홀아비 택이 아빠를 위해 골목 아줌마들은 번갈아 밥 당번을 맡는다.

하지만 5000만 원이던 은마아파트가 10억 원이 되는 동안 옛 골목들은 거의 사라졌다. 골목길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공동체 의식도 함께.

도시 개발과 산업화로 없어진 골목길 이웃들은 이젠 디지털 동네로 옮겨갔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이웃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모르는 세상이 됐다. 심지어 층간 소음으로 얼굴 붉히다가 칼부림까지 하는 게 오늘날 이웃이다.

‘쌍팔년도 가족극’에 중년세대는 물론 젊은층까지 열광하는 인기의 핵심은 ‘골목길 정서’가 아닐까.

봉황당 골목 안에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정을 나누는 유사(類似)가족을 보면서 아날로그적 공동체 문화를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 그 시절의 소품을 철저히 되살리며 리얼리티를 추구한 이 드라마의 본질은 판타지다.

응팔은 80년대 후반을 추억하는 중년들의 ‘우리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우리의 바람에 응답하는 게 드라마뿐이라는 게 아쉽다.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
#봉황당#골목길#응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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