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나 변호사 의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이 저지르는 범죄는 남다르다. 남들은 근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재능을 무기로 저지르는 탓에 당한 사람도 알아채기 어렵다. 그 죄상을 캐낼 전문가 역시 한솥밥 먹는 처지라 그런지 명백히 드러난 대목만 간신히 지적하기 십상이다. 뭔 짓을 해도 견제받지 않는 세렝게티국립공원의 야생 사자와 다를 바 없다.
검찰이 180여 차례나 여성 신체를 몰래 촬영한 의학전문대학원생을 기소유예 처분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의사의 기능으로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이런 성향의 사람이 의사가 되면 진찰 과정에서 교묘하게 죄를 지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갖는 건 정말 쓸데없는 기우일까. 법적으로야 아무 문제없을지 몰라도 나는 내 가족이 의사 가운을 입은 그런 사람에게 진찰받는 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나중에 이 사람이 의사가 되면 기소유예 처분한 검사나 이를 결재한 그 윗선 간부의 집에서 하룻밤씩 잘 수 있게 하면 좋겠다. 믿음직한 사회의 일꾼이라고 봤다면 배우자와 아들딸이 함께 사는 자기 집에서 재워도 괜찮지 않겠나. 그러지 않고서야 일반 백성은 ‘짜고 치는 고스톱’ 정도로 보고 고소득 전문직을 향한 끝없는 불신을 갖게 되지 싶다.
의사는 환자와의 신체 접촉이 불가피한 직업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의사’를 검색하면 성과 관련된 온갖 범죄가 연관 검색어로 뜬다. 관련 기사는 수도 없이 많다. 믿고 상담했더니 변호사가 오히려 자신을 등치고 발등 찍었다는 사연도 우수수 쏟아진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회계사의 무더기 부정 역시 가벼이 볼 사안이 아니다.
삼일 삼정 안진이라는 국내 최고의 회계법인에 소속된 회계사 32명이 업무상 알게 된 특정 기업 정보로 주식 투자에 나서 거액을 벌어들였다가 지난달 적발됐다. 나중에는 문제점을 찾아 고쳐 달라는 취지로 거액을 줘가며 뱃속까지 보여줬더니 그걸 약점 잡아 ‘소문 내지 않을 테니 돈을 내놔라’라고 협박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공포≥분노.’
‘사자 범죄’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당장은 강한 분노가 확 일어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앞날이 더 걱정이라는 공포감이 앞선다. 더 세분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전문가는 그만큼 늘어날 테고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다중 상대의 교묘한 전문가 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내 몸을 보여주고 회사의 은밀한 서류를 까 보이는 건 내가 절박할 뿐 아니라 상대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런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릴 판이다. 과거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런 사회적 위협이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에 적발된 회계사 대부분은 경력이 짧은 젊은 세대다. 성범죄에 연루된 의사나 의전원생 역시 20, 30대다.
나는 이들이 초중고교 때 인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지 의심한다. 탁월한 영어 수학 성적에 가려 욕을 입에 달고 살거나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를 폭행하진 않았나 하는 의심이다. 성적이 모든 죄과를 덮어주다 보니 커서도 제멋대로인 것 같다. 명문대 진학을 누구나 확신하는 학생이 사고를 치면 그 부모의 반응은 똑같다. “우리 애는 그럴 리가 없어요! 공부만 하는 애라고요! 걔들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잖아요!”
친구를 밟고 일어서야 좋은 평가를 받는 우리 교육 시스템이 가져온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워낙 출중한 능력을 가진 탓에,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는 사람에겐 지금보다 많은 인성 교육을 제발 좀 시켰으면 한다. 그 부모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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