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종이 냄새가 풍겼다. 20㎡(약 6평) 남짓한 공간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손때가 묻은 헌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낡은 나무 책장은 하나같이 가운데가 바닥 쪽으로 움푹 꺼져 얼마나 오랫동안 책이 꽂혀 있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3호선 홍제역 4번 출구 인근에서 23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헌책방 ‘대양서점’이 31일 문을 닫는다. 22일 찾은 대양서점 입구에는 ‘책방 정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수익은 오래전부터 안 좋았는데 몸까지 안 좋아져서 더이상 운영하긴 힘들겠더라고요.” 목장갑을 끼고 고물상으로 보낼 책을 정리하고 있던 사장 정종성 씨(73)는 폐점 이유를 덤덤하게 말했다.
정 씨가 헌책 장사를 시작한 건 1979년 지인이 서울 강북구에서 운영하던 헌책방을 인수하면서부터다. 1985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으로 서점을 옮기면서 간판을 ‘대양서점’으로 바꿔 달았다. 정 씨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 대양면에서 딴 이름이다. 이후 1992년 가게 터를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23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대양서점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새 책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특히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에게 대양서점은 ‘오아시스’였다. 베스트셀러는 단연 학습지와 참고서였다. 정 씨는 “가난한 학생은 ‘수학의 정석’ 한 권을 통째로 사지 않고 목차별로 나눠서 사 갔다”고 회상했다. 많은 학생이 찾던 탓에 사복 경찰들이 불온서적을 팔지 않는지 감시하러 자주 들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헌책방을 찾는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에 쥐는 돈도 줄었다. 때로는 하루에 만 원도 벌지 못했다. 5년 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 씨의 허리에 이상 신호가 왔다. 척추신경이 지나는 척추관이 좁아져 통증을 유발하는 ‘요추관 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이날 만난 정 씨는 왼쪽 다리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 폐점 소식을 들은 단골손님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천추엽 씨(83)는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대한국사’와 ‘백과서점 전집’ 등 헌책 4만5000원어치를 사갔다. 한 손님은 가죽장갑을 사주기도 했다.
내년이면 대양서점은 사라지지만 이곳에 있는 헌책들은 정 씨 아들의 헌책방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게 된다. 아들 정태영 씨(42)는 2000년 아버지를 도와 헌책 장사에 뛰어들었고 현재 대양서점에서 100m 떨어진 곳에서 헌책방 ‘기억속의 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시원섭섭합니다. 아들이 있어 든든하면서도 30년 넘게 하던 일을 그만두니 오랜 친구를 잃는 것 같아요.” 정 씨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서점을 나설 때 입구 옆에 붙어 있던 시가 눈에 들어왔다. 2년 전 한 단골손님이 정 씨에게 선물한 시라고 했다.
‘주머니 가난한 사람도/사라진 책에 목마른 사람도/다리품 책방마실 즐기는 사람도 (중략) 헌책방에서 이야기빛 어깨동무하며 누립니다.’ 이곳을 찾던 수많은 단골손님도 당분간 정 씨처럼 헛헛한 마음이 가시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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