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은 처음 만난 기자에게 연신 밥을 먹으라는 인사를 건넸다. 방금 식사를 마쳤지만 찾아온 손님을 배려한 것이다. 연말이라 위문객으로 북적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조용했다. 할머니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 재방송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한일 수교 50주년인 올해는 일본군 위안부 해결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올해가 보름도 안 남은 상태에서 할머니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에게 위안부 문제 타결을 위해 연내 방한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전의 시점에 물어본 ‘올해도 문제가 해결이 안 돼 서운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계속 겉돌았다. 일본군에 끌려갔던 고초, 돌아온 고국 땅에서 받은 멸시, 6·25전쟁과 생활고 등 인고의 시절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꿈 많은 소녀였을 위안부 피해자
올해 89세인 유희남 할머니는 “아프지만 않았으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81세 때 폐암 진단을 받았다. 나눔의 집 생활은 4년째다. 이날도 “항암제를 먹어서 피부가 엉망이다”라며 연신 주름잡힌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고 부끄러워했다. 식민지 국민이라는 질곡(桎梏)만 없었다면 예쁘고 꾸미기 좋아하는 소녀로 자랐을 어릴 적 모습이 연상되는 듯했다. 충남 아산 출신의 외동딸은 16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뒤 여태 고향집에 가지 못했다. 젊을 때는 친척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못 갔고 지금은 건강이 나빠서 갈 수가 없다. 시력이 나빠져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할머니는 모두 10명. 이 중에는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거나 부축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가 절반이 넘는다. 이날도 TV 주변에는 할머니 5명이 둘러앉아 있었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유 할머니뿐이었다. 건강 문제로 대화가 불가능했고, 옛날 일을 꺼내기조차 싫어하는 분들도 있었다.
유 할머니가 ‘나눔의 집’으로 간다고 했을 때 친딸은 “약을 먹고 같이 죽자”고 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 보기 부끄럽다는 거였다. 할머니는 그런 딸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래도 난 자식들 버리지 않고 길렀고 사위는 중앙부처 과장까지 지냈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대화 곳곳에는 친할머니와 같은 푸근함과 피해자로서의 강퍅함이 섞여 있었다. 기자에게 밥 먹었느냐고 물어볼 때와 최근 꽃밭 때문에 싸웠다는 강일출 할머니를 흉보는 모습은 아주 달라 보였다. 신산한 90년 인생을 살아온 노인이, 몸까지 불편해진 상태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매일 웃음소리만 나오지는 않을 터였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 할머니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탈북자 중에도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겨 한국 정착 후에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기 물건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청순을, 젊음과 추억을 송두리째 뺏긴 할머니들의 소소한 하루는 또 이렇게 지나간다.
“박유하 교수는 우리 얘기를 들어야 한다”
박유하 교수 얘기가 나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는데 왜 박 교수가 내 인생을 평가하느냐”는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국의 위안부’ 책을 쓴 박 교수는 ‘위안부는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 등의 표현 때문에 할머니들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해 기소된 상태다. 학계와 언론에서 ‘학문의 자유’를 들어 박 교수를 기소한 것이 무리라고 지적하는 데 대해서도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동안 수치심 속에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았다. ‘집필의 자유’도 좋지만 억울한 내 인생을 16세로 돌려놓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박 교수는 피해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자연스레 대화는 일본군 위안부 해법으로 이어졌다. 유 할머니는 박근혜 대통령이 3·1절, 광복절 경축사에서 위안부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챙긴 것에 대한 고마움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답답하다고 말했다. 일본과 담판을 지을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주철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두 차례 만났고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국장도 한 차례 만났다. 하지만 구체적인 협상 경과를 알려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한일 협상 결과는) 피해자와 국민이 납득할 수준이 돼야 한다”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에 비춰보면 의외였다. 정부가 구체적인 해법을 갖고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2월까지 한일 국장급 위안부 협의는 총 11차례 이뤄졌다.
어쩌면 할머니들의 요구사항이 워낙 명확하기 때문에 정부가 재차, 삼차 확인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할머니들은 일본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 쓸 돈이 필요해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계속해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보상은 이뤄졌고 법적 책임은 없다’고 하니 공식 사죄의 징표로 정부 예산이 들어간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유 할머니는 “방금 들은 얘기는 잊어버려도 70년 전 과거는 잊어버릴 수가 없다”며 “내 90년 인생 비탈길을 모두 보상받으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푼돈은 이제 더러워서(기분이 나빠서)라도 안 받는다”고 했다.
“돈이 아니라 일본의 마음을 원해”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238명.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 접수 첫해인 1993년 153명이 등록했고 2006년까지 해마다 1∼15명씩 등록했다. 2007∼2011년엔 신규 등록이 없다가 2012년 2명, 2013∼2014년 각 1명이 추가됐다.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 규모에 비해 등록자 수가 턱없이 적은 것은 사회적 분위기와 생존 가족의 체면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최근 3년 사이 추가된 4명도 친인척의 독려로 등록은 마쳤지만 일부는 질환을 앓고 있는 데다 치매 증세까지 있어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말했다. 좀 더 일찍 등록했더라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관련 시설에서 치료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미루고 미루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양지로 나온 셈이다. 그러나 올해만 9명이 숨지는 등 등록 피해자의 80%인 192명은 이미 사망했다. 생존자 46명의 평균 나이는 89세. 최고령자는 99세다. ‘일본이 생존자가 모두 숨지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냐’고 할 만큼 여명이 길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한국 정부의 지원이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올해의 경우 치료사업비로 총 2억8500만 원이 지급됐으며 간병비는 1인당 최대 1350만 원(1년 기준) 제공됐다. 피해자로 처음 등록할 때 특별지원금 4300만 원이 나오며 매달 생활안정자금으로 104만3000원씩 제공된다. 내년에는 생활안정자금이 126만 원으로 인상된다. 또 기초수급 대상의 혜택과 함께 기초노령연금, 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다. 주택 보수나 휠체어, 틀니 등 ‘맞춤형 지원’이나 해당 지자체의 별도 지원도 있다.
그렇다고 생활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나눔의 집 2곳이 피해자 생활시설을 운영하고 있지만 수도권 이외 지역 거주자들은 대부분 자택에 머물고 있다. 생활시설에서 지내다 연고지로 되돌아간 경우도 있다. 연고지에선 해당 지역 인권·시민단체들이 돌보고 있지만 끼니를 놓치거나 돈을 아끼기 위해 난방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내면서 건강을 더 해치기도 한다고 한다. 생활시설에 들어가면 돈이 드는 게 아니냐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피해자 생활시설은 모두 무료다.
내년에는 힘겨운 삶을 내려놓은 할머니들의 안식처가 새로 마련된다. 여성부는 충남 천안시 국립 망향의 동산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특별 묘역과 추모비를 조성하기로 했다. 내년 상반기(1∼6월)에 제막식이 있을 예정이다. 망향의 동산은 일제 침략으로 고국을 떠난 뒤 해외에서 숨진 재일동포 등의 안식을 위해 1976년 세워졌다. 일본 중국 대만 러시아 등 각국의 동포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탑과 묘역, 봉안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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