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늘어나면 뭐합니까.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후배들 눈칫밥을 먹느니 희망퇴직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낫죠. 금전적으로도 조금 낫고요.”(희망퇴직을 신청한 농협은행의 한 지점장)
NH농협은행은 이달 초 장기근속자와 내년부터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만 56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신청서를 제출한 344명 중에는 농협은행이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한 임금피크제 대상자 249명 전원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액 연봉을 받는 장기근속자의 임금을 깎는 대신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임금피크제가 도입됐지만 대상자 전원이 희망퇴직을 선택하면서 수혜자는 없고 제도만 남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27일 금융계에 따르면 내년부터 임금피크제 적용 연령을 만 55세에서 만 57세로 높이기로 한 IBK기업은행이 최근 만 54세 이상 직원 21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결과 90%에 가까운 188명이 퇴직을 선택했다. KEB하나은행도 올 상반기(1∼6월)에 희망퇴직을 실시해 임금피크제 대상자 220여 명을 거의 대부분 내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시중은행들이 희망퇴직 조건을 임금피크제보다 더 좋게 내걸어 퇴직을 사실상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협은행의 한 지점장은 “희망퇴직을 하면 최근 연도 평균 월급의 26개월 치를 받지만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면 앞으로 3년간 받는 총액이 24개월 치에 불과하다”며 “회사에 남기보다 퇴직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40세 이상, 10년 이상 근속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퇴직을 실시해 총 961명을 내보낸 한국SC은행은 근속 기간에 따라 32∼60개월 치 임금과 자녀 학자금, 재취업 및 창업 지원금을 지원했다. 지난주에 만 40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퇴직 신청을 받은 KEB하나은행은 24∼36개월 치 임금을 지급하는 등 임금피크제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해 신청자들이 많이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임금피크제가 현장에서 정착하려면 장기근속자들이 스스로 임금피크제를 선택해 직무 경험을 공유하고 노후 생활 안정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위해 기업은 임금피크제 근로자에 맞는 직무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영기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은 “청년일자리를 늘리고 중장년 세대의 정년을 보장함으로써 세대 간 상생하자는 임금피크제의 본래 취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기업들이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의 직무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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